한줄 詩

저문 들녘의 꽃들을 위하여 - 박남원

마루안 2021. 9. 18. 19:42

 

 

저문 들녘의 꽃들을 위하여 - 박남원

 

 

꽃들이 핀 저문 들녘에 서면

바람은 시든 추억의 재가 되어 돌아온다.

젊은 날 꿈을 찾아 멀리 날아갔던 새들은 기억조차 가물거리고

나는 저문 들녘의 꽃길을 걷는다.

대낮부터 햇빛과 흰 구름과 따듯한 공기에 한껏 향연을 베풀다가는

어둠이 온 무렵에서야 겨우 꽃들은 자신의 길을 내게 열어주었다.

그리고 나는 그 손짓을 받아들인다.

아쩌면 지금 저 꽃들은 나보다 더 슬픈 기억의 무거운 짐을 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 기억의 마을 귀퉁이에선 언제나 푸른 꿈들이 어둠 속에 저물어가고

한 모금 목마름의 물조차 야속했던 혹은 운명과도 같은 시간들.

그래서 꽃은 미처 꽃이 되지 못한 것들에게 조그만 위로의 말을 전하는 것이다.

세상에 환한 것들은 생을 살아오는 동안 한 번쯤 아픈 기억을 갖고 있다.

그 아픈 기억으로 꽃은 비로소 꽃이 되어 아름다운 것이다.

 

 

*시집/ 사랑했지만 어쩔 수 없었던 어느 날/ 도서출판 b

 

 

 

 

 

 

악어의 눈물 - 박남원

 

 

정글에서는 악어를 조심해야 하지만

악어보다 더 무서운 것은 악어의 눈물이었다.

음험하고 수상한 눈빛만 살피다 짐짓 화려한 꽃의 유혹에 넘어가

끝 모를 어둠의 나락으로 나뒹굴어지기 일쑤였으니

 

믿을 수 있는 건 오직 맨발로 딛고 있는 흙과 흐르는 강물뿐.

숲의 감미로운 선율조차 조심해야 했다.

흙의 알갱이들을 하나씩 디디며 스치는 나뭇잎도 내 것이 아니면 아낌없이 돌려보내야만 했다.

 

천신만고 끝에 덤불을 헤치고 나와 숲 사이로 지나는 강 하나 바라보게 될 때쯤

강물은 여전히 어둠 속에 흐르고 외로움이 물밀듯 밀려들게 될 것이다.

그러면 친구, 그 외로움과 벗이 되시게

고독과 벗이 되지 않으면 긴 어둠의 정글을 벗어날 수가 없다네.

 

산다는 것 자체가 전쟁 아닌가.

화려한 꽃무늬 장막을 걷어내면 아비규환의 그 독하고도 고독한 밤.

푸른빛 강의 흐름만을 시원의 기억으로 간직한 채

숲의 어둠을 헤치며 강길을 혼자 걸어야 하는 것,

산다는 건 그렇게

먼 길을 돌아 꿈같은 그대의 어깨 위에

힘겹게 귀향하듯 내려앉는다는 것.

 

 

 

 

# 박남원 시인은 1960년 전북 남원 출생으로 숭실대 독문과를 졸업했다. 1989년 <노동해방문학>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막차를 기다리며>, <그래도 못다 한 내 사랑의 말은>, <사랑의 강>, <캄캄한 지상>, <사랑했지만 어쩔 수 없었던 어느 날>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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