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오늘의 안부 - 김가령

마루안 2021. 9. 17. 19:35

 

 

오늘의 안부 - 김가령


전봇대 뒤쪽 얼었던 금 간 벽이 열린다 노릿한 오후가 가만 가만 속살을 드러낸다
몇 개의 본색이 톡 톡톡, 터진다
나를 향해 건너온다

너무 많은 노랑들이 포개져
틈에서 바깥으로 새로 돋은 꽃잎들이 안쪽을 들키고 싶은 마음에 젖는다

벌들이 꽃 뒤로 사라진다
쉿, 이별하지 못하겠다

한겨울에 핀 개나리처럼 추웠던 날이 있었지
오랫동안 싹을 틔우지 못하고 사소한 입술마저 지우고 냉정하게 괜찮은 척, 해야만 했지

누군가에게 수신 거부된 사람처럼
나는 밖으로 나서지 못하는데
단 한 번도 노랑을 배반해본 적 없는 개나리는 확고하다
봄까진 아프지 말라고 떼로 피는 것 같다

오늘부터 안부는 온화하고 간지럼은 부드럽다


*시집/ 너에게 붙여준 꽃말은 미혹이었다/ 문학의전당


 

 



너에게 붙여준 꽃말은 미혹이었다 - 김가령


누군가 꽃을 살해했다
보랏빛이 빈 탄피처럼 떨어졌던 라일락 라일락,
목격자 중 나에게만 비극이었다

담벼락을 사이에 두고 신장개업 가게에선 트로트가 흘러나왔다 그 노래마저 내겐 진혼곡으로 들리고 피에로 분장을 한 남자의 입가엔 하루 종일 웃음이 박제되어 있었다

파국은 예감보다 매 순간 앞질러 간다
열매를 갖지 못한 꽃의 죽음 앞에서 낯선 관찰자가 되면
나는 이질일까 동질일까

파열은 내 눈동자 안에서 방향을 만들고 멈추었다가 미끄러진다 눈이 붉어질 때까지 해가 지기 전까지 그렇게 종일 목격을 반복했다

햇빛에 죄의식은 반사되었지만 태양은 신경 쓰지 않았다

오늘밤 꿈을 꾸어도 가장자리에서부터 라일락이 자랄 것만 같았다 팔랑거리는 보라색 몽환들,

너에게 붙여준 꽃말은 미혹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