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미, 생은 이제 아름다웠다 - 유기택
드러눕고 싶은 생이 있다
일곱 해를 기다려, 일곱 날을 울었다
일곱의 전생을 건너와 다 살았다
자그마치
염천 칠월 한길로 칠성판을 깔았다
타인의 낯선 죽음에 쉽게 동의했다
산 자들의 슬픔을 장사 지냈던 것
그럴 리 없는
단발 총소리가 들렸다
총소리가 날아간 쪽으로
적막한 구멍이 하나 길게 생겨났다
고요를 아물린 정적
빙하 속에 갇힌 공기 한 방울
젊은 나이에 죽은 형은
이제 나보다 어리다
벽을 아무리 두드려도 안이 안 들리는
좀 눕고 싶은 안이 있다
태생이 우발적일 수 없는 총을
오래전부터
손잡이를 아름다운 상아로 장식한
쓸쓸한 권총 한 자루를 가지고 싶었다
*시집/ 사는 게 다 시지/ 달아실
야화 - 유기택
새벽 한 시, 옆집 시멘트 담장 아래서
사랑 하나가 끝나고 있네
뿌리치는 여자를 달려가 돌려세우고
애완견 같은 사내 하나 통사정을 하네
단 세 마디
딱 한 번만, 제발, 응
화내다 달래다 우는 시늉을 하는 여자
사내가 급하게 무릎을 꿇네
알았으니까 오빠 오늘은 그냥 집에 가
사내는 여자의 오빠였네
사내가 인도 경계석에 앉아 넋을 놓네
예정이 어그러지고 있었을 것이네
날 버려두고 가라구
오빠가 가야 나두 갈 거 아니냐구
텔레비전 드라마 여럿을, 이미 보아서
나는 다 알겠네
사내는
여자의 포장지를 벗기고 싶었던 것이네
그때 옆집 담장 위에서는
나팔꽃이 보라보라 피고 있었을 것이네
사랑 하나가, 지루하게 끝나고 있었네
# 유기택 시인은 강원도 인제에서 태어나 춘천에서 자랐다. 시집으로 <둥근 집>, <긴 시>, <참 먼 말>, <짱돌>, <호주머니 속 명랑>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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