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천박한 사랑에 관하여 - 서윤후

마루안 2021. 9. 12. 21:45

 

 

천박한 사랑에 관하여 - 서윤후

 

 

아내는 내게 오라고 하였지만

나는 가지 않았다

 

그것이 침대 귀퉁이만 돌아도 갈 수 있는 일인지, 맨발로 유리 조각을 지나야 하는 일인지 알 수 없었지만 목소리만 남았고 나는 숲에 불을 지른 것 같다

불이 끝나는 쪽으로 향하기 위하여

 

마주댄 것이 많아 타오르기가 쉬웠다 그 숲에서 아내는 물을 심어둔 것 같다

 

괘종시계 앞에서 불확실한 것과 손에 쥔 영수증 앞에서 불투명한 것이 우리를 각각 다른 곳으로 불러냈다 사랑을 멀리하라는 신의 계시였고 거역했지만 나와 아내는 거의 동시에 제 발로 사랑을 빠져나왔다

살려달라는 말을 둘째 아이처럼 낳고

 

아픈 사람에게는 가고 싶거든, 첫차든 막차든 빨리 가야만 한다는 이 심정을 해치우고 싶으니까, 그래도 이게 사랑이 아니라면

야채죽의 당근을 건져올리는 플라스틱 숟가락

이마에 얹어보는 차가운 손바닥

그런 사랑의 도구는 유물이 된 것 같다

 

아마도 아내는 괘종시계를 저수지에 던지며 시간을 회고하거나 물이 불어나기를 바랄 것이다 불을 지핀 사람은 불을 끌 수 없다는 생각으로 나를 자꾸 불러내고

 

저멀리 그을린 그네가 흔들린다

우리는 서로의 마지막 암시가 되지 않기 위해서

두 눈을 지그시 감았다

오랜 풍문이었다

 

 

*시집/ 무한한 밤 홀로 미러볼 켜네/ 문학동네

 

 

 

 

 

 

주말부부 - 서윤후


당신은 아주 먼 친척처럼 보인다
고향의 특산물을 먹지 않아도 잘 사는 사람이 되었다
피를 세어보다가 사랑을 권하게 되었고
우리는 함께 건강이 나빠졌다

당신의 못질이 필요한 나의 벽에는
하얀 귀들이 걸려 있어 제법 우아하다
북유럽풍이라 부르지만 실상은 없는
접시의 무늬처럼 어지러울수록 기분은 좋았다
달력은 활력이 될 수 있다고 믿었기에

뒤섞인 빨래에서 살냄새가 흐르고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의 이름을 부르다가 입맛이 없어졌다
몇억 년 동안 계속되어온 이 피의 유산을 생각하면
학교 앞 전당포에 맡긴 시계가 생각났다
유전은 소름 돋는 것이니까

집에 있어도 집에 가고 싶다고 말하는
보고 있어도 보고 싶다 말하는
말하지 않아도 다 안다는.....
엉겁결에 우리는 세상에서 서로의 약점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이 된다
피도 눈물도 모르게

집 앞 버려진 신문들은 모두 평일의 소식들뿐이었다
당신은 게속 자고 싶어한다
조금 쉬면 괜찮다고 말하지만
심장에는 피가 멎지 않는다
비행기가 저녁과 밤 사이를 가로지르며 날아간다
벌어져 있는 시간을 어쩔 줄 몰라 하며
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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