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혼자와 그 적들 - 이문재

마루안 2021. 8. 16. 19:18

 

 

혼자와 그 적들 - 이문재


혼자 살아보니
혼자가 아니었다

혼자 먹는 밥은
언제나 시끄러웠다
없는 사람 없던 사람
매번 곁에 와 있었다
혼자 마시는 술도 시끌벅적

고마운 분들
고마워서 미안한 분들
생각할수록 고약해지는 놈들
그 결정적 장면들이 부르지 않았는데
다들 와서 왁자지껄했다 저희들끼리
서로 잘못한 게 없다며 치고받기도 했다

혼자 있어보니
혼자는 불가능했다
나는 나 아닌 것으로 나였다

 

 

*시집/ 혼자의 넓이/ 창비

 

 

 

 

 

 

우리의 혼자 - 이문재


혼자는 바쁩니다
외롭거나 쓸쓸할 겨를이 없습니다
혼자는 오늘도 모든 걸
혼자서 다 하려고 정신이 없습니다
친구를 만나지 않는 것도 혼자
전기밥솥 예약 버튼을 눌러놓지 않는 것도
옛 애인 이름을 생각하지 않기로 한 것도
국가고시에 접수만 하고 시험장에는 안 가는 것도
미국 드라마 세편을 연속으로 보는 것도
혼자서 다 하느라 겨를이 없습니다
그러면서도 혼자는 자기가 혼자라는 걸
누구한테 들키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매번 자기 자신에게 발각됩니다
의도하지 않아도 노출되고 맙니다
그래서 혼자는 더욱더 혼자이고
그래서 더더욱 혼자서 잘하려고 애를 씁니다
혼자 주변에는 온통 혼자입니다
혼자는 늘 혼자들에게 둘러싸여 있습니다
주위에 있는 혼자들도 다 알고 있지만
서로 다들 혼자이기 때문에 간섭하지 않습니다
오늘도 혼자는 바쁩니다
하고 싶지 않은 일은 절대하지 않기 위해
하고 싶은 일이 대체 무엇인지 알아라도 보기 위해
어제와 다름없이 열심입니다
때로 혼자는 뭐가 뭔지 몰라 멈칫합니다
그럴 때면 자기 이름을 몇번 불러보기도 하고
일없이 가족관계증명서를 떼어보기도 합니다
실내에 있는 전등을 있는 대로 다 켜놓거나
벽에다 칼을 던져보기도 합니다
그러다가 갑자기 자기 자신이 낯설어지면
우리 혼자는 다시 대단히 바빠집니다
그러다가 또 지치면
혼자는 모든 게 다 그냥 싫다고
아니 모든 게 그냥 다 좋다고 혼잣말을 합니다
우리 혼자들이 모여 사는 공동주택 입구에는
멋진 붓글씨가 하난 걸려 있는데요
화이부동(和而不同) 존이구동(存異求同)
눈길을 주는 혼자는 거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