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밑장 - 권상진

마루안 2021. 8. 10. 21:59

 

 

밑장 - 권상진


기회는 언제나 뒤집어진 채로 온다
공평이란 바로 이런 것
이 판에 들면 잘 섞어진 기회를
정확한 순서에 받을 수 있겠지
그래, 사는 일이란 쪼는 맛

딜러는 펼쳐놓은 이력서를 쓰윽 훑어보고
몇 장의 질문들을 능숙하게 돌린다
손에 쥔 패와 돌아오는 패는
일치되지 않는 무늬와 숫자로 모여들던
가족들의 저녁 표정 같았지만
여기서 덮을 수는 없는 일

비밀스레 돌아오는 마지막 패에는
섞이듯 섞이지 않는 카드가 있었고
꾼들은 그걸 밑장이라 불렀다
보이지 않는 손으로 밑장을 빼내
옆자리에 쓸쩍 밀어줄 때, 딜러의 음흉한 표정이
밑장의 뒷면에 슬쩍 비치고 있었다

계절이 지나도록 판은 계속된다
어제 함께 국밥을 말아먹고 헤어졌던 이들이
더러는 있고 한둘은 보이지 않는 새 판에서
겨우내 패를 덮고 있던 나무가 자리를 당겨 앉아
새잎을 쪼고 있다
쪼는 족족 봄이다

밑장 없는 계절에 이력서를 쓰는 밤이 길다

 

 

*시집/ 시골시인-K / 걷는사람

 

 

 

 

 

 

테트리스 - 권상진


다섯 평 원룸에 삼대가 삽니다
서로 살을 맞대는 일이
이 방에선 오히려 도덕적입니다

필요한 건 거의 다 있어요
꼭 필요하지 않은 게 없을 뿐
우아하게 놓여 있지 않을 뿐

딱 추워 죽지 않을 만큼, 딱 더워 죽지 않을 만큼
비좁은 계절은 독특했지만
봄과 가을이 그 사이에 한 번씩 있다는 게 어디예요

어쩌다 일요일
할머니의 낮잠이 가로로 눕습니다
아이들 숙제는 세로로 엎드리고
엄마는 하릴없이 동네를 걷습니다
경계는 언제나 접점 입니다

바닥에는 서열이 있습니다 혹은 없습니다
할머니 이부자리가 깔리고 나면
우리는 나이순으로 혹은 귀가 순으로 배치됩니다
매일 새로운 모양으로 완성되는 가족은
밀려난 옷걸이와 모로 누운 밥상이 있어서
언제나 안심입니다

방을 집이라 부릅니다
가끔 틈이 생기는 날도 있지만
그렇다고 이 집에다가
다시 칸을 지를 순 없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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