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내가 되지 않는 것들 - 서윤후

마루안 2021. 8. 11. 21:58

 

 

내가 되지 않는 것들 - 서윤후


높은 곳에서 떨어졌거나 바닥을 구슬프게 흘리고도
멀쩡한 것들

내가 되지 않으려고 안간힘 쓰는
주워 담을 수 없는 것들

사람을 용서하는 일이
사람을 고치는 일과 만드는 일 사이에서

기도가 엇나가는
신의 겨드랑이 뒤에서 어린양 부리는 것들
두서없는 꿈의 멀미를 앓는 것들

표본과 다른 독개구리들
제 안에서 독을 터뜨려 만질 수도
가질 수도 없이 꽉 물었던 이름을 놓아버린 것들
매번 진심이었던 생일 다음날처럼

허겁지겁 먹었던 사람의 눈빛이
사과나무 밑에서 배앓이하는
뒤틀린 틈으로 마구 솟구치는 송충이들
하하하 갉아먹히는 오래된 농담들

실없이 저물었다가 돌아오지 않는
옛사랑에 꽂아둔 실핀들
결코 흘러내리지 않을 것들

내가 매달려도 내가 될 수 없는
공중의 손잡이들
손님 없이 시동 거는 버스 안엔

내가 되진 않고
나를 기다리기만 하는 옆자리들


*시집/ 무한한 밤 홀로 미러볼 켜네/ 문학동네

 

 

 

 

 

 

비틀린 - 서윤후


서로를 긁어주다가 아프다는 말을
다 써버린 불행에 대해 말할 필요가 있다
이름을 완성하기 위해
쪼개진 얼굴만 골라 모으는 악취미에 대해서도
무기고엔 신형 설탕 포대가 가득한데
통성명만으로 꺼내기엔
조금 아득하다는 소식이 들려오므로
흐릿해진 것에 대해 말해야 한다
그을린 유리가 잃은 것에 대해서도
싸움과 사랑이 한 종목의 스포츠인 것도
항의할 필요가 있다
이토록 가려운 이름을 참을 수 없어서
깨지는 성질을 배워야 한다
수수깡으로 만든 집을 떠나려면
이빨자국이 필요하다
실용적인 사람이 되기 위해
모호와 보호 사이
단숨에 옷핀을 찔러넣을 수 있어야 한다

 

 

 

 

*시인의 말

 

서로가 서로에게 난간이 되어주던

이 벼랑이 참 좋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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