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벽오동 심은 뜻은 - 이산하

마루안 2021. 8. 11. 21:52

 

 

벽오동 심은 뜻은 - 이산하


처음 강을 건너갈 때
나는 그 강의 깊이를 알지 못했다.
물론
그 깊이가 내 눈의 깊이라는 것도 알지 못했고
수심이 얼마나 되든 끝까지 가본 자만이
가장 늦게 돌아온다는 법도 알지 못했다.

그 강 한가운데에는 온몸이 상처투성이인
늙은 벽오동 한 그루가 지키고 있었다.
가지 위에는 일생 동안
부화할 때와 죽을 때만 무릎을 꺾는다는
백조 한 마리가 살며
생채기마다 부지런히 단청을 하고 있었다.

어느덧 세월이 흘러 허기지도록 적막한 지금도
나는 여전히 그 강의 깊이를 알지 못하고
또 백조가 왜 벽오동을 떠나지 않는지도 모른다.
다만
내 삶의 무게가 조금씩 수심에 가까워질수록
수면 위에서 반짝이고 있을 내 여생의 무늬가
강 가장자리로 퍼져나가며 단청이라도 한다면
내 비록 끝내 바닥에 이르지는 못할지라도
백조처럼 기꺼이 두 번 무릎을 꺾을 수는 있겠지.


*시집/ 악의 평범성/ 창비

 

 

 



용서 - 이산하


어릴 적 새벽마다 옆집의 달걀을 몰래 훔쳐 먹었다.
어른들이 이빨에 톡톡 쳐서 먹는 게 너무 멋있어서
나도 계속 훔쳐서 흉내를 냈다.
1주일 후 옆집 아저씨가 알도 못 낳는 게
모이만 축낸다는 이유로 암탉을 잡아 삶았다.
우리 집에도 맛보라며 삼계탕 한 그릇을 가져왔다.
아버지가 장남이 먹어야 한다며 나한테 주었다.
그날 이후 지금까지 난 삼계탕을 먹은 적이 없다.
영문도 모른 채 억울한 누명으로 목숨을 잃은
50년 전의 암탉에게 용서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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