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출렁이는 사막 - 이기록

마루안 2021. 8. 10. 21:53

 

 

출렁이는 사막 - 이기록

 

 

고백처럼 날 것의 유목 생활을 시작합니다

만찬을 기다리며 고개 숙이고 당신의 심장 소리를 들었지만

새기지 않은 문신만 탁자 위에 남았답니다

두 발로 선 적 없는 매일매일

기억하는 일에 그만큼의 잔이 필요한 것은

꼬리를 잃어버린 어제 때문입니다

코가 간질간질한 밤엔

당신의 목덜미를 쓰다듬을 수 있을까요

철거된 그림자가 웅크린 채 깨어나고 있어요

아무 일도 없다는 듯

건조한 이름들이 천장에서 떨어지자 눈을 들기 시작하지요

뻗어가는 시간을 주워들면 사라진 말은 습하지만

마른 것은 손가락이에요 손가락을 깨물면 부두교의 주문처럼

다시 살아날 겁니다

간절한 당신을 너무 늦게 알아버렸나 봐요

먼 곳을 돌아왔나 봐요

만질수록 가시 박힌 손에서는 피가 납니다

마른 가슴만 차오르는 날들입니다

감당할 만큼만 버거운 중력이 찌르는가 봐요

머무르던 폭풍만 감쪽같이 사라져버린

분명 이곳은 출렁이는 사막입니다

깊숙하게 새벽을 달아놓아요

 

 

*시집/ 소란/ 책읽는저녁

 

 

 

 

 

 

노랑 - 이기록


어제로부터 바랜 연락이 온다


상여 행렬로 이어진 점들은 태생부터 부패했었다
배를 덜 채웠는데 꽃들이 피었고 그가 말없이
떠났다 중얼거리지만 귀는 구름 위로 날아갔다
주문한 말들은 돌아오지 않았다

불온한 병들이 뿌리를 내렸다 깊은 심지를 묻고
바람에 중독되었다 당분간 이름은 사라졌다
한껏 구미를 당기기 위해 독한
기침을 해댔다 멈추지 않는 아랫배는
이름을 부를 때마다 노랗게 변심했다
그림자에 짐승들이 매달렸고

밤이 길어질수록 불면은 깊었다
비가 내릴 때 조용히 방안에 걸어 들어가 발효되었다
이빨 자국이 남은 주말은 살이 오르지 않았다
듬성듬성 귀가 자라기 시작한다

유충들이 입을 벌리고
소문으로 엉킨 껍질을 벗긴다
침 삼키며 부드럽게 냄새를 몰고
허공으로 피어난다 휜 적막에서
눅눅한 봄이 익어간다
가라앉았던 속도만큼 되돌아온다

 

 

 

 

# 이기록 시인은 2016년 <시와사상> 신인상을 수상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소란>이 첫 시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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