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머나먼 나라 - 이상원

마루안 2021. 8. 2. 19:22

 

 

머나먼 나라 - 이상원

-천년송(千年松)

 

 

비탈진 바닷가 관광 일주도로가 생기면서 뒷산이 마을을 데리고 대륙과 한통속이 된 것은 오래전 일이었다.

 

바다에 막혀 오도 가도 못하는 자투리 새로 생긴 지번의 묵은 암석 위에는 세월의 천 년 굴욕을 견뎌온 소나무 한 그루

 

안쓰러워 치솟은 암반이 속내를 열어가며 한 폭을 받혀줄 뿐, 쉼 없는 해풍에 가지도 키도 잃고 하늘만 바라 엎드린 저 애껴운 혈혈단신.

 

웃자란 벚나무들 무더기로 상춘의 꽃 등을 다느라 지척에서 길은 밤에도 환하게 밝은데, 한 때일 뿐이야 자위하듯 중얼거려도 보고

 

머리를 연신 조아리며 지나가는 배들의 한낮을 그리운 옛적인 양 굽어보며 더러 씁쓸하지만, 그래도

 

남몰래 여무는 솔씨들 눈빛을 반짝이며 잃어버린 먼 산을 바라보고 있다.

 

 

*시집/ 변두리/ 황금알

 

 

 

 

 

 

머나먼 나라 - 이상원

-새벽

 

 

새벽이 우두커니 머리맡에 앉아 있다

임차한 지상의 방에서 노숙하는 내게 남은

허름한 공간에 빌붙어 그도 또한 시한부의 노숙을 끝내고

불을 켜자 기척 없이 문밖으로 사라진다. 미안한 일이지만

한 개피 담배를 물고 공존불가(共存不可)라는 말을 생각한다.

 

나는 방금 깨어났다. 꿈에서는 누군가를 만났지만 얼굴도 계보도 어렴풋해 그저 할매요, 라는 말만 입속에 맴돌았으나 발음이 되지 않았다. 측은한 듯 나를 오래 바라보던 그는 허공에 커다란 눈 하나로 남아, 동굴 같은 동공 속으로 아장아장 걸어 들어갔다.

천지는 새하얀 눈밭이었다. 오래 묵은 묘비들이 연등 마냥 환하게 늘어선 그곳에 이르자 비로소 내 뼈마디에 육신(肉身)이 입혀졌다. 돌아서서 처음으로 내려다보는 사방은 새벽을 둘러쓴 채 미명(未明)의 망망대해로 꼼지락대고 있었다. 높고 하얀 산의 세계와 그 산의 손길을 기다리는 일망무제 여린 물결, 문득 공존(共存)이란 말을 생각다가 울컥 설움마냥 울음이 치밀었다.

 

빨래를 해야 하는데 귀찮아 눈을 감는다.

간밤 술병 속에 들어가 아귀마냥 벌름대며

간간 까마득한 시간의 저편 골짜기를 헤매느라

얼룩져 기다리는 내장에겐 미안한 일이지만

불을 끄고 다시, 갈 데 없는 새벽을 들이기로 한다

미아(迷兒)가 된 꿈 얘기 따위는 오래 묻어두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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