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나비는 생각도 없이 - 김가령

마루안 2021. 7. 31. 22:46

 

 

나비는 생각도 없이 - 김가령

 

 

허공에서 허공으로

호랑거미 한 마리가 교차하며 집을 지어놓았어요

태양과 바람과 생각은 다 빠져나갔는데

나비 한 마리 덜컥 걸려들었어요

 

출렁, 아이가 던진 돌의 파문

길은 찢어지고 거미는 달아나고

끈적이는 날갯짓이 얕은 숨을 뱉어냈어요

 

해가지는 방향으로 모퉁이를 품고 걸어요 길은 막다른 표정을 내밀고 나는 모퉁이를 보고 모퉁이는 나를 봐요 작은 새 한 마리 그늘을 쪼며 이쪽에서 저쪽으로 옮겨와요 검은 새가 눈물을 흘려요

 

하늘 위에서 보면 골목은 거미줄 같겠지요

난 그곳에 걸려든 한 마리 짐승

 

그날의 거미는 다시 더 높은 나뭇가지로 기어올라 견고한 집을 지을 거예요

그날의 나비가 또 생각도 없이 날아오겠지요

 

생과 사가 맞물린 모퉁이

셀 수도 없는 직전과 직후가 나를 선택하고 있어요

 

 

*시집/ 너에게 붙여준 꽃말은 미혹이었다/ 문학의전당

 

 

 

 

 

 

당신은 이제 늙었다 - 김가령

 

 

쉽게 부서지지 않는 바깥은 녹이 슨 지 오래다

두드리는 건 순간의 집중이 필요하다

 

내 목소리만 내부에 가득차서

나는 내가 늘 비좁기만 하다

 

어젯밤 당신은 벽 앞에서 몇 장의 포스터를 들추며 서성거렸다 줄장미는 웃음일까 피터팬은 왜 늙지 않을까

 

눈을 감으면 벽에 걸지 못한 말들이 바닥에 나뒹군다

부질없는 상상과 몽상이 나를 밟고 지나간다

 

당신은 예술적으로 웅크리고 있다

 

나를 이해하지 못하는 망치가 문을 두드린다

포기엔 집중이 필요한데 망치는 이성적으로 완벽하다

 

두드리는 순간 내 생각은 안쪽으로 꺾이거나 튀어 오르며 테두리를 흔들고

자학을 쏟아내기 시작한다

 

그러니까 빨리 나와, 갇혀 잊지 말고

 

 

 

 

# 김가령 시인은 경북 경산 출생으로 2015년 <전북도민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2020년 아르코 창작기금을 수혜했다. <너에게 붙여준 꽃말은 미혹이었다>가 첫 시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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