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팽나무의 궤도 - 김점용

마루안 2021. 7. 30. 22:01

 

 

팽나무의 궤도 - 김점용

 

 

아침을 먹고 동네를 한 바퀴 돌아왔을 때

팽나무는 거기 있었다

아버지와 싸우고

멀리 지구를 한 바퀴 돌아왔을 때도

팽나무는 그 자리에 있었다

어떤 집은 망하고 어떤 집은 흥했다

당집 할머니가 죽은 개 한 마리를 색동 줄로 칭칭 감아 둥치에 매면서

그날 밤 팽나무의 궤도를 정해 주었고

팽나무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비를 맞고 눈을 맞고 바위처럼 산처럼 서 있었다

달도 별도 팽나무 위에서 뜨고 졌다

태양은 오늘 출발했으나

팽나무는 어제 도챡해 있었다

집도 들판도 구름도 결혼도 장례도

모든 것이 팽나무를 중심으로 돌고 돌았다

돌고 돌아서 팽나무 안으로 들어갔다

차례차례로 들어갔다

꽃이 되고 열매가 되고 팽이가 되었다

 

바람에 마른 잎이 빙그르르 날린다

작은 회전이 큰 회전을 숨긴다

 

 

*시집/ 나 혼자 남아 먼 사랑을 하였네/ 걷는사람

 

 

 

 

 

 

가건물 - 김점용


태풍은 서해로 오는데
비 내리는 동해에 앉았다

아내와 싸우고 술을 마시면 조금 덜 미안하듯
고향에 가지 않으려고 태풍을 불러냈다
칠순 넘은 형은 혼자 제사를 지내고
나는 저 검푸른 물숲을 안고 소주를 마신다
무거운 비바람 속에서도 일어서는 낱낱의 물결이
잎이 되고 꽃이 되고 나비가 되는 이치를
내 모르지 않건만
술집 탁자 위에 쌓인 빈 소주병이
보이지 않는 먼 수평선에 걸려
넘어질 듯 넘어질 듯 휘파람을 분다

살아온 곳곳에 빗물이 샌다
서서히 젖어드는 나비 날개 한쪽
놓아버리고 싶다
일을 하고 통장에 돈이 들어올 때마다 느꼈던 심한 모욕감
내 노동의 가치가 헐해 보여서 그런 건 아니었다
영혼을 팔아 돈을 번다는 누군가의 말 때문에
그 저주스런 능멸 때문도 아니었다

고무 다라이 가득 빗물을 받아 칼을 씻고 도마를 헹구듯
조금씩 낡고 허물어져 간다는 것
저렇게 미쳐 날뛰는 거대한 바다도 내일 아침이면
제 몸의 물결을 한 장씩 접고 접어 제 안으로 고요해진다는 것
움푹 팬 저 나무 도마 한가운데 고인 물처럼
비리고 슬픈 일 아닌가

헐거워진 몸
내가 늘 학생들에게 해 왔던 말
"싸구려 영혼을 갖지 마세요"
거울을 깬다
거센 비바람에 등이 젖는다
안쪽을 내줘야 할 차례다
태풍도 버리고 온 길
값싼 영혼 어디로 갈까

 

 

 

 

# 김점용 시인은 1965년 경남 통영 출생으로 1997년 <문학과사회>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오늘 밤 잠들 곳이 마땅찮다>, <메롱메롱 은주>, <나 혼자 남아 먼 사랑을 하였네>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