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저곳 - 임성용

마루안 2021. 7. 28. 22:33

 

 

저곳 - 임성용

 

 

누구든 저곳에 올라갈 때

내려갈 생각을 하고 올라간 것은 아니라네

 

한 발 한 발 허공을 오르는 힘은

오로지 마지막 남은 떨림뿐이라네

 

저곳

붙잡을 수 없는 바람이 태어난 곳

밤과 낮 해와 달이 말라가는 곳

 

저곳

벌거숭이 하늘에서 내려가도

편안히 발 딛을 땅 찾지 않으려네

 

저 높은 곳

한 사람이 사는 곳

 

저 높은 곳

한 사람이 죽은 곳

 

또 누가 평생을 다해

또 누가 목숨을 다해

 

 

*시집/ 흐린 저녁의 말들/ 반걸음

 

 

 

 

 

 

흐린 저녁의 말들 - 임성용

 

 

따뜻한 눈빛만 기억해야 하는데

경멸스런 눈빛만 오래도록 남았네

얼크러진 세월이 지나가고 근거 없는 절망

우울한 거짓말이 쌓이고 나는 그 말을 믿네

 

가난하고 고독한 건 그리 슬픈 일이 아니라네

진짜 슬픈 건 누구도 사랑할 수 없다는 것

용기도 헌신도 잃어버렸다는 것

잊힌 사람이 되었다는 것

 

무수하게 사라지는 저항의 말들

어디서나 기억에도 없는 낯선 얼굴들

당신의 존재를 견딜 수 없는 흐린 저녁이 오고

중력을 잃은 바람은 나를 데려가지 않네

 

울지 말라는 말은 울다 죽으라는 말

쓸쓸한 말들이 마른 풀로 우거졌네

나를 떠돌던 그림자가 얼음나무로 굳어지면

누구에게 살아온 잘못을 빌어야 하나

 

저녁노을은 검은 수의를 하늘 건너편에 던지네

출렁이는 지평의 끝에 새가 헤치고 간 길이 있네

새들의 노래는 배우지 않아도 그 마음 알 수 있네

목이 긴 새들이 무슨 말을 나누며 쉼 없이 날아가네

 

 

 

 

# 임성용 시인은 1965년 전남 보성 출생으로 1992년 노동자문예 <삶글>에 시와 소설을 발표하면서 창작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하늘공장>, <풀타임>, <흐린 저녁의 말들>이 있다. 2002년 전태일문학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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