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얼굴을 쉬다 - 김나영

마루안 2021. 7. 22. 21:53

 

 

얼굴을 쉬다 - 김나영

 

 

한 사흘 집 안에 틀어박혀 있으니

얼굴에서 해방된다

내 얼굴이 내 얼굴이 된다

타인의 시선이 각질처럼 떨어져 나간다

 

집 밖으로 나가는 순간

얼굴은 내 것이면서 내 것이 아닌 것이 된다

보이고 싶은 나와

보이지 나는 한 번도 일치하지 않는다

 

얼굴은 붉고 물컹한 낭떠러지

근엄한 표정

무서운 표정

다정한 표정을

장소에 따라 화장과 분장으로 덧칠하며

무기처럼 사용한다

 

이틀 만에 세수를 했다

해골과 가죽과 살만 오롯이 잡히는 내 얼굴을

오랫동안 씻고 또 씻었다

혹시라도 남아 있는 타인의 시선을

내 얼굴로 함부로 횡단하던 타인의 흔적을 씻고 또 씻어 냈다

 

나는 곧 외출을 할 것이다

독자의 손으로 넘어간 내 작품처럼

내 얼굴은 곧 금이 가고 해체되고 해석되어 왜곡될 것이다

나는 또 얼굴을 팔러 나간다

 

 

*시집/ 나는 아무렇지도 않다/ 천년의시작

 

 

 

 

 

 

중년 - 김나영

 

 

더 오를 데가 없다 높이 던져 두었던 시선의 가장자리가 까맣게 오그라든다

 

갈 길을 상실한 귀때기 너덜너덜한 담쟁이, 높이를 잃은 사통팔달 난감하게 펼쳐지는 난간, 끝까지 가 보지 않아도 끝이 보이는 뛰어내리지도 되돌아가지도 못하는 평평한 산

 

무럭무럭 늙어 가는 일에 연명하는 갈 데가 뻔한데 갈 때까지 가야 하는 살아도 살아도 가을과 겨울만 반복되는 눈을 떠도 감아도 눈꺼풀 위로 우우 몰려와 있는 길고 긴 우울

 

발 닿는 곳마다 지루하고 집요하게 이어지는 소실점

 

가도 가도 고속도로 갓길 낮은 포복으로 앞서서 설설 기어가는 속도를 상실한 수평의 연대

 

 

 

 

 

*시인의 말

 

나는 내게 도착(倒錯)한다

밥집과 꽃집과 사람의 난간 안팎에 손을 대고

선택하고 생략하고 확대하고 변형해 보았다

써도 써도 하염없음과 허망함의 동선

나는 내게 도착(到着)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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