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굴을 쉬다 - 김나영
한 사흘 집 안에 틀어박혀 있으니
얼굴에서 해방된다
내 얼굴이 내 얼굴이 된다
타인의 시선이 각질처럼 떨어져 나간다
집 밖으로 나가는 순간
얼굴은 내 것이면서 내 것이 아닌 것이 된다
보이고 싶은 나와
보이지 나는 한 번도 일치하지 않는다
얼굴은 붉고 물컹한 낭떠러지
근엄한 표정
무서운 표정
다정한 표정을
장소에 따라 화장과 분장으로 덧칠하며
무기처럼 사용한다
이틀 만에 세수를 했다
해골과 가죽과 살만 오롯이 잡히는 내 얼굴을
오랫동안 씻고 또 씻었다
혹시라도 남아 있는 타인의 시선을
내 얼굴로 함부로 횡단하던 타인의 흔적을 씻고 또 씻어 냈다
나는 곧 외출을 할 것이다
독자의 손으로 넘어간 내 작품처럼
내 얼굴은 곧 금이 가고 해체되고 해석되어 왜곡될 것이다
나는 또 얼굴을 팔러 나간다
*시집/ 나는 아무렇지도 않다/ 천년의시작
중년 - 김나영
더 오를 데가 없다 높이 던져 두었던 시선의 가장자리가 까맣게 오그라든다
갈 길을 상실한 귀때기 너덜너덜한 담쟁이, 높이를 잃은 사통팔달 난감하게 펼쳐지는 난간, 끝까지 가 보지 않아도 끝이 보이는 뛰어내리지도 되돌아가지도 못하는 평평한 산
무럭무럭 늙어 가는 일에 연명하는 갈 데가 뻔한데 갈 때까지 가야 하는 살아도 살아도 가을과 겨울만 반복되는 눈을 떠도 감아도 눈꺼풀 위로 우우 몰려와 있는 길고 긴 우울
발 닿는 곳마다 지루하고 집요하게 이어지는 소실점
가도 가도 고속도로 갓길 낮은 포복으로 앞서서 설설 기어가는 속도를 상실한 수평의 연대
*시인의 말
나는 내게 도착(倒錯)한다
밥집과 꽃집과 사람의 난간 안팎에 손을 대고
선택하고 생략하고 확대하고 변형해 보았다
써도 써도 하염없음과 허망함의 동선
나는 내게 도착(到着)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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