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명왕성의 항변 - 주창윤

마루안 2021. 7. 18. 21:27

 

 

명왕성의 항변 - 주창윤

 

 

태양도 깨어나서 보지 않으면

죽은 별이다.

 

나는 늘 깨어

저 바깥 끝에서 밀짚모자 같은 토성이나

삶은 달걀 같은

행성들의 소멸을 바라보며

슬퍼하였나니

 

내 품계가 몇 단계 떨어져서

들어보지도 못한 왜소행성이 되어

그냥 떠돌이 별이 되었지만,

너희들의 바깥에서

더이상 바깥으로 나갈 수 없는 그 끝에서

기체의 사유로

살아왔다는 것을 아느냐!

저 바깥 끝에서 살아온

삶의 경계를 너희가 생각해본 적이 있느냐!

 

깨어 있지 않으면

태양도 그냥 죽은 별이다.

 

 

*시집/ 안드로메다로 가는 배민 라이더/ 한국문연

 

 

 

 

 

 

사우나 출애굽기 - 주창윤

 

 

재앙의 나날들이었다.

열정의 청년 노예들은 애굽으로 팔려갔다.

 

한강 하구는 녹차라테가 되었고

양서류들은 시내의 우물마다 알을 낳았다.

열대 박쥐 떼가 들끓었고

독종(毒腫)이 퍼져

모두 다 마스크를 쓰고 다녔다.

 

선지자를 따라

홍해로 가는 홍대입구역 지하도에서

서교로 가야 하는지 동교로 가야 하는지 길을 잃었다.

바다는 갈라지지 않았다.

 

거세지는 미세 모래폭풍과 구름기동 너머

저 높이 사우나 산이 보였다.

산상으로 통하는 계단을 밟고 옥상으로 올라가서

계명을 받았다.

"각자도생하라."

 

 

 

 

# 주창윤 시인은 1963년 대전 출생으로 한양대 신문방송학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영국 글래스고대 영화와 텔레비전 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86년 <세계의 문학>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물 위를 걷는 자 물 밑을 걷는 자>, <옷걸이에 걸린 양>이 있다. <안드로메다로 가는 배민 라이더>는 23년 만에 낸 세 번째 시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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