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흙수저 - 이산하

마루안 2021. 7. 21. 21:59

 

 

흙수저 - 이산하


자본주의는 한 사람이 대박이면 한 사람이 쪽박이고
신자유주의는 한 사람이 대박이면 열 사람이 쪽박이다.
어느날 한강에 투신한 머리가 희끗희끗한 한 남자가
자기를 극적으로 건져낸 구조대원에게 억울한 듯 항의했다.
"사고 난 것도 아닌데 왜 이런 멍청한 짓을 해?
당신이 앞으로 내 인생 책임질 거야?"
"....."
"흙수저는 아무리 발버둥쳐도 안 되는 세상이란 걸 알면서
왜 무책임하게 구하냔 말이야!"
"....."
"대신 살아주지도 못하고 대신 아파해주지도 못할 거면서...."
젊은 구조대원은 처음부터 끝까지 한마디도 못하고
죄지은 사람처럼 묵묵히 들었다.
그동안 수많은 목숨을 구했지만 이날 문득 처음으로
자신이 그들의 고통을 연장시키고 있다는 것을 의심했다.


*시집/ 악의 평범성/ 창비

 

 

 

 

 

 

베로니카 - 이산하


모든 게 그렇겠지.
이제 패색이 짙은 낙엽처럼 다른 길은 없겠지.
홀로 핀다는 게 얼마나 속절없이 아픈 일인데
아름답기 전에는 아프고 아름다운 뒤에는 슬퍼지겠지.
그대 뒤에서 그대를 은은하게 물들이거나
세상 뒤에서 세상을 은은하게 물들이거나
이기지 않고 짐으로써 세계를 물들이는
그런 저녁노을 같은 것이겠지.
어차피 질 줄 알면서도 좀더 잘 지기 위해
잘 지기 위해 잘 써야지, 거듭 나를 치다가도
이 난공불락의 외로움은 어쩔 수 없어 혼자 중얼거리겠지.
낙, 낙, 나킨온 헤븐스 도어.....
낙, 낙, 나킨온 헤븐스 도어..... 

모든 게 그렇겠지.
아직 다른 길이 없으니 왔던 길 계속 가야겠지.
케테 콜비치 판화 같은 세상도 여전하고
들판에 하얀 목화꽃이 팡팡 터지는 꿈도 사라지고
이젠 너무 멀리 이송되어 돌아갈 곳도 잊어버리고
방향이 틀리면 속도는 아무 소용도 없어지겠지.
어느날 내가 심해어처럼 베니스에 홀로 누워
마지막 별빛의 조문이 끝날 때마다
속눈썹 같은 물안개로 피어오르던 그대의 가슴에 묻혀
그대의 폐사지 같은 눈빛을 보며 다시 중얼거리겠지.
낙, 낙, 나킨온 헤븐스 도어.....
낙, 낙, 나킨온 헤븐스 도어.....

 

 

 

# 이산하 시인은 1960년 경북 영일 출생으로 경희대 국문과를 졸업했다. 1982년 필명 '이륭'으로 <시운동>에 연작시 <존재의 놀이>를 발표하며 등단했다. 시집으로 <한라산>, <천둥 같은 그리움으로>가 있다. <악의 평범성>은 22년 만에 나온 그의 세 번째 시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