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리동 책방 만유인력 - 전장석
고갯마루를 마수걸이한 마을버스가
몇 사람과 접점하고는 내리막길로 이항한다
간판이 분필로 쓰인 책방은 방금
새로운 이론을 설명하려던 중이다
저녁 산책의 중력파가 만리동까지 미치면
거기, 작동이 멈춘 낡은 탁자 위의 시간들
수공(手工)이 되어 나를 내부 수리한다
무중력의 이 도시를 용감하게 횡행하던
한 권의 시집, 단 한 줄의 문장 속엔
궤도를 이탈한 소우주가 지구본처럼 떠돌고
평생 떨어진 사과를 줍다 허리 휜 내 이력이
통증이 가시지 않은 호롱불로 밤새 매달려 있다
막대그래프 같은 아파트와 낮은 곡선의 지붕들
그 아찔한 간극에서 자주 멀미하던 바람이
서점 어딘가에 불편한 기록으로 꽂혀 있다는데
언제쯤 그것들을 제대로 읽어낼 수 있을까
불구의 시간들이 버릇처럼 그리움으로 발화되면
나는 또 책갈피 속 언덕 마을을 찾아갈 것이지만
식어가는 계절의 밧줄을 놓지 않고 있는 담쟁이덩굴이
태양의 인력(引力)을 증명하듯 무서운 발톱을
금 간 담벼락에 양각한 만리동
담력이 약한 짐승 한 마리 계단에 쭈그리고 앉아
언젠가 굴레방다리 아래 가을비로 뚝뚝 떨어져
변곡점이 된 기억 하나
만유인력처럼 나를 끌어당긴다
*시집/ 서울, 딜큐사/ 상상인
BOOK아현 - 전장석
숨이 찰수록 뜻이 달아오르는 문장
동네 어르신들에겐 난독의 보릿고개다
앞뒤 표지가 뜯겨져나간 동네
그날그날 표지가 되어 살아가는 사람들은
부록 몇 장 부욱 찢겨져도 눈치채지 못한다
숙박계 대신 쓴 무명씨 저자의 방명록은
얼음의 구근이 녹아 흘림체 일색이다
아직 지구상에 남아 있는 몇 개의 구절은
이 동네의 밤하늘을 뒤적거리다가
마지막 페이지쯤에서 그냥 별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책을 덮어도 조여 오는 어두운 골목길
스스로 문장 속으로 들어간 책은
어느 중고서점에서 절판인 줄 모르고 꽂혀 있고
갈라진 벽 속의 풀꽃들은 목차를 버린 지 오래
두 손으로 이마를 짚던 달이
잠시 난독의 계단에 앉아 있는 동안
낡은 진열장처럼 바람에 흔들리는 동네
쥐들이 갉아먹은 침묵 속엔
수백 권의 장서가 우글거리고 있을 것이다
*시인의 말
이것은
서울이라는 자궁 속에서 그린
무형의 지도다
손이 아니라 발로 더듬거린
어떤 거처에 대한
독백이다
시간의 금줄을 밟은
장소가 객사한
어느 날의 꿈속 이야기다
'한줄 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흙수저 - 이산하 (0) | 2021.07.21 |
---|---|
명왕성의 항변 - 주창윤 (0) | 2021.07.18 |
거울의 내생 - 고태관 (0) | 2021.07.18 |
빗방울들 - 박주하 (0) | 2021.07.17 |
저녁 강이 숲에 들어 - 박남준 (0) | 2021.07.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