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거울의 내생 - 고태관

마루안 2021. 7. 18. 21:13

 

 

거울의 내생 - 고태관

 

 

포대기에서 아기가 운다

잠에서 깨면 늘 목이 쉬었다

 

혼자서 양말 신고 바지도 입는 여섯 살

풀린 신발 끈 일부러 안 묶는 중학생

담치기하다가 따귀 맞는 고등학생

입대 전 벌거벗은 애인에게 안겨 잠든 새벽

소름처럼 돋아난 눈이 떠진다

다시 잠들면 복도에 쫓겨나 있었다

 

마흔 번째 생일 분에 넘치도록 취해 잠들었다가

오후 늦게 일어나 세수를 한다

반쯤 감긴 눈에 흐리게 고여

고개를 돌릴 때마다 거울과 마주친다

 

지금 나는 아흔이 된 내가 꾸는 악몽

머리가 지끈거리고 다리가 끊어진 듯 쑤신다

깨어날 수 없는 잠에 빠져

자정이 자정으로 이어지고 꿈쩍할 수도 없다

 

온종일 벽에 기대 있는 늙은이

가는 숨을 몰아쉰다

잿빛의 눈으로 허공을 비춘다

어제 꾼 꿈은커녕

당장 나도 건져 올릴 수 없다

 

무릎 꿇은 채 복도에서 졸고 있다

신발 끈을 밟고 넘어진다

알아서 바지와 양말을 벗는 아이

무성영화가 흘러간다

 

먼지 뒤덮인 거울에 눈곱 붙은 얼굴이 박혀 있다

 

 

*시집/ 네가 빌었던 소원이 나였으면/ 걷는사람

 

 

 

 

 

 

소실점 - 고태관

 


물결 위로 넘치는 석양
괜한 돌멩이나 내던지면 얕아진 강물이 눈망울로 번져 와
멀리 빈집으로 쓸려 가네

아득하도록 붉게 고인 하류에서는
무성한 넝쿨로 엉키는 얼굴들
바다에 닿기 직전 급하게 불어 오르네

오늘 일기를 미뤄 둔 새들이
낮은 바람 박차고 돌아갈 채비를 서두르는데
발목 다 젖은 미명을 들쳐 업고 돌아가는 다리 아랫길

멀리서 흐릿하게 떠오른 어머니
내가 닿아야 할 별 하나
깜박하고 켜진다

 

 

 

 

*시인의 말

 

긴 속눈썹이 눈동자를 찌른다고

떼어낸 속눈썹을 불어내면서 소리 없이 소원을 빌어

네 소원이 나였으면 어쩌나

 

(....)

 

파도가 모래 위 글자를 지우는 것처럼

파도가 잠시 멈춰 쉬길 바라는 것처럼

 

깨어나도 생생한 꿈에서는 커다랗게 부풀어 오른 눈사람을 만들고 있었어

시린 손을 불면서 눈을 굴린 자리에 새겨진 글자는 읽지 못했지만

너를 소리쳐 부르느라 입을 크게 벌렸을 때

웃음이 터진 내 입안에서 눈송이가 녹아내렸네

 

<바다에 눈이 내리면>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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