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빗방울들 - 박주하

마루안 2021. 7. 17. 21:46

 

 

빗방울들 - 박주하


더 멀리 가 봅시다
가장 멀리 가는 길을 알고 있는 것처럼
멀리 가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각자 자기소개는 하지 맙시다
완벽한 하나의 사건처럼
순식간에 불거졌다가 사라집시다
시간이란 슬픈 눈망울을 버리고
흘러내리는 것은 목숨을 만져 보는 일
전생에서도 잊지 못한 미소를 생각하며
최대한 멀리 뛰어내려 봅시다
서로의 어깨를 부축하지도 말고
젖을수록 단단해지는 돌멩이처럼
이 밤을 훌쩍 넘어갑시다
거짓말을 들은 기색 없이
서로의 눈물만 들고 바닥으로 달아납시다
바닥은 힘이 없으니 장렬하게 무너집시다
불빛이 비에 젖어 번지는
저 길바닥의 무늬 속으로 사라집시다


*시집/ 없는 꿈을 꾸지 않으려고/ 걷는사람

 

 

 

 

 

 

칠점사 - 박주하
-무심무석(無心無石)


그는 칠점사에 물려 몇 달 기억을 잃었고 기억을 되찾았으니
저녁 한번 먹자고 했다

같이 가자, 같이 가자 서로 손목 움켜잡던 날들
가을 산빛에 녹아 사라졌다고 했다

일곱 걸음을 둘러싼 그의 번민은 실핏줄에 섞여 헝클어지고
기억들도 함께 길을 놓았겠지만

나도 언젠가 누군가에게 독을 품었던 사람이어서

그 독을 해독하느라 푸른 심장을 놓치기도 하여서

저 어딘가에서 홀로 부대끼는
온갖 목숨의 떨림이 밥술 위에 어른거렸다

거리에 떨어져 뒹구는 은행나무의 노란 열매들
오래 공들인 유언처럼 짙고 뜨거웠다

 

 

 

 

 

*시인의 말

 

누군가의 그늘이 되어 주려던 순간

지나온 계절의 쓸모를 반성하게 되었다

 

하마터면 저 여린 꽃잎을

무자비하게 사랑할 뻔했고

또 잊을 뻔했다

 

밀물 드는 가질 수 없는 말들이 많았다

 

손을 내밀지 않고도

마음이 겹치는 날들을 연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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