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미용실이 그리 멀지 않은 재개발지역 - 심명수

마루안 2021. 7. 15. 19:37

 

 

미용실이 그리 멀지 않은 재개발지역 - 심명수


이미 빠져나간 길들은 헝클어지고
시간이 길어질수록 남겨진 창들은 출출하게 닫혀 있다

출출한 골목을 오르면 꼬르륵 허방을 딛고 내려오는 어둠
물밀 듯 살아온 날들이 고스란히 철거당하는 마음이다

너는 머리를 자른다
집집마다 추레함이 흘러내린다

켜지 않은 창은 꺼진 창이라 할 수 없듯
나이가 들수록 캄캄해지는 얼굴
밀가루 반죽처럼 뭉개졌다 국수가락으로 쏟아내는
풀어진 면발이 찰랑거린다

펌을 한다
나도 서둘러 어떠한 조치가 필요하다

쫓기듯 등 떠밀리는 도미노의 연쇄반응에
집집마다 버려진 세간, 세간살이들

길가에 나앉은 헐렁함, 고단함, 고집 센, 의자, 찌그러진, 쓰레기들이 범람한

나의 몽실몽실한 머릿속이 곱슬곱슬하다


*시집/ 쇠유리새 구름을 요리하다/ 상상인

 

 

 

 

 

수제비를 뜨며 - 심명수


수제비를 뜬다
기억이란 고작 눌어붙는 냄비를 젓는 것처럼 사소한 일
눈발처럼 은총처럼 잠시 앉았다 날아간 새의 둥지처럼
그는 마을 산기슭이 집이었던 적이 있다
밤마다 마을 정수리에 따뜻한 별들이 내려와 박혔다

박다가 구부러진 못
어머니는 더 이상 못질을 하지 않았다

수제비를 젓는다
오래된 맛을 떠올리는 것처럼 밋밋한 일은 없겠지만
사내아이는 등이 간지러웠고
불행은 어릴 때부터 시작이었다

누군가에게 덜미가 잡힌 듯한 추레한 사내아이
곱사등이라고 꼽추라고 이름 붙여진 아이
동네 아이들에게 충분한 놀림거리였고
쥐뿔도 없이 풍산 종친들은 어머니에게 죄라는 낙인을 찍었다
그렇게 몰락은 명분을 얻었다

수제비를 먹는다
멸시와 따가운 시선을 감내한 어머니가 있었다
수제비의 논리로 따지면 모든 수제비는 수제비
수제비가 무릎 꿇는 일을 본 적이 있는가?
꼬부리고 돌아앉은 이상한 슬픔은 그때부터 감지되었다
입속에서 뜨거운 수제비를 굴린다

협곡에서 냇물이 몸서리치며 휘어진다

수제비를 뜨던
산기슭 짚 검불을 무덤처럼 덮고 자던
그렇게 춥지만은 않던, 어릴 적
어머니가 떠주던 감자 수제비

 

 

 

# 심명수 시인은 충남 금산 출생으로 2010년 부산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쇠유리새 구름을 요리하다>가 첫 시집이다.

 

 

'한줄 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건너와 너머 - 최준  (0) 2021.07.16
혼자 울 수 있도록 - 이문재  (0) 2021.07.16
선천적 우울 - 박순호  (0) 2021.07.15
이후 - 윤의섭  (0) 2021.07.12
역병이 도는 여름 - 이상국  (0) 2021.07.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