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이후 - 윤의섭

마루안 2021. 7. 12. 19:32

 

 

이후 - 윤의섭

 

 

오늘까지는 꿈이었어요

 

이렇게 말하는 유골단지

지난 번 갖다 놓은 꽃에 생기가 돋아나고 있었다

 

살아있다는 건 같이 기억할 수 있다는 가능성

너라는 꿈을 꾼 것이다

 

운중로라고 쓰인 길에 들어서면서

한 번은 다시 오게 될 줄 어떻게 알았을까

주인이 바뀌었지만 식당에선 익숙한 저녁밥 냄새가 나고

천년 궤적을 따라 줄 지어 날아가는 새들

눈을 감으면 세상의 모든 태양이 차례로 지고

구름 속에서 출발한 비행기가 모두 구름 속으로 착륙하는 동시의 기억

 

오늘부터는 처음 부는 바람과 처음 생긴 빗방울 사이

 

뒤를 돌아보니 거대한 유골단지가 잠들어 있다

누구였을까 꿈이 다 지워진 것만 생생하다

 

 

*시집/ 내가 다가가도 너는 켜지지 않았다/ 현대시학사

 

 

 

 

 

 

그 후 - 윤의섭


오늘 아침은 깨진 조각 나는 파편에서 눈을 떴다
편린의 날이란 떨어진 꽃잎처럼 빠르게 시드는 것이다
창문은 빛나지 않았고 마찬가지로 기억은 죽었다
이 조각은 완벽한 난파선이거나 소행성이다 흘러갈 뿐
달력에는 아무런 표시가 없다
어떤 약병에 적힌 유효기간은 알 수 없는 연대였다
누가 부르는 줄 알았는데 바람 소리였다 나는 외로워진 것이다
아침을 맞이하는 나의 형식은 장례식과 같다
떠나보내고 산 자의 시간을 살아가는 제의
여전히 흐리다 나는 태양을 알고 있는 것이지만
이 조각은 장구한 상실이다 결코 되돌릴 수 없는
마모와 퇴화로 나는 희미해진다
밀린 빨래를 하고 아침밥은 거르고
외출을 시도해야지
거리는 익숙할 것이고 누군가에게 인사를 건넬 수도 있겠지
오늘 아침이 처음은 아닌 것도 같고

 

 

 

 

# 윤의섭 시인은 1968년 경기 시흥 출생으로 아주대 국문학과를 졸업하고 중앙대 예술대학원 문예창작 석사, 아주대 국문학과 박사과정을 졸업했다. 1992년 경인일보 신춘문예 당선과 1994년 <문학과사회>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말광량이 삐삐의 죽음>, <천국의 난민>, <붉은 달은 미친 듯이 궤도를 돈다>, <마계>, <묵시록>, <어디서부터 오는 비인가요>, <내가 다가가도 너는 켜지지 않았다>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