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필요 이상의 호기심 - 박순호

마루안 2021. 6. 30. 22:13

 

 

필요 이상의 호기심 - 박순호


햇빛이 펄럭거린다
타락한 웃음, 검은 어깻죽지에도
불의 혀가 핥고 간 흰 재 위에도
말을 꺼내지 못하는 과묵한 표정 앞으로
두 팔을 펼치는 찬란

쳐내고 쳐내도 거친 표현이 웃자란다
나는 몸을 낮추고
깨지기 쉬운 가장자리부터
약속되어 있지 않는 모든 것
고여 있는 침묵을 움켜쥐지만

어딘가에는 차가운 성질이 숨어 있고
막상 내가 꺼내놓은 물건들마다 싸구려 냄새가 진동한다

쓸쓸하기 짝이 없는 건방진 말투
필요 이상의 호기심

애초부터 싹수가 노란 아이들은 그늘을 늘려갔고
즉흥적인 기분은 대부분 찢겨져 파기된다

안개를 들춰내고
푸른 줄기를 꽂아놓는다면 서정이 되는가
그렇다면 바싹 마른 잎을 조금 더 붙잡아둘 수 있을까
때로 웃음만으론 해결되지 않는 일들
문서로 꾸며진 일련의 협박들

타지로 돈 벌러 나간 사이
빈집에 택배와 우편물을 들이듯
서정은 주인 없이도 활발하지만 가끔 무례하다

나는 필요 이상의 걱정을 안고 사는 편이다
숨죽이는 울음을 손질하길 좋아한다


*시집/ 너의 은유가 나를 집어 삼킬 때/ 문학의전당

 

 

 

 

 

 

그 계절 - 박순호

 

 

그 계절

창 너머 달을 망치로 내리치면 유리알처럼

마루 위를 구를 것만 같았지

새끼를 가진 검둥이는 송곳니를 드러내며 사나워지고

강 언저리에는 여울목이 만들어졌지

 

그 계절

나는 쓸쓸한 노래를 찾아 들으며 떠돌아 다녔지

종아리에는 길을 찾아 헤맨 핏줄이 자라나고

손가락 마디는 어둠을 담아둔 자루처럼 불룩하고

예상한 대로 상처는 깊어서 손쓸 수가 없었지

여전히 바탕은 만들어지지 않았지

 

그 계절

친절했던 사람들은 빈털터리인 나를 알아보고는

마음에도 없는 위로를 전하며 사라져갔지

말줄임표에 기대 점점 흐릿해졌지

 

그 계절

미국흰불나방이 정원을 잠식했지

역병(疫病)에 관한 정부의 문자가 쌓여가지만

건조해서 바람이 불면 날아갈 듯 허약했지

 

그 계절

수백 권 책을 버리고 집 안에 갇혀 지냈지

냉소를 머금은 얼굴이 마스크에 가려 아무도 알아보지 못했지

 

 

 

 

*시인의 말

 

나는 여러 달을 정원에서 보냈다.
호미와 낫은 무뎌질 틈이 없었고, 손톱 밑은 까맸다.
식물의 뿌리가 어울릴 만한 자리를 찾아 구덩이를 팠다.
그러는 사이,
움푹 파인 눈두덩에서 많은 별빛이 쏟아져 내렸다.
나는 삶이 주는 두려운 질감을 간직했으며 정원에서 주운 문장을 그러모았다.
가끔 이역에서 오는 소식은 슬픔과 그리움을 한데 묶어 동백나무 아래 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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