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미자의 모자 - 이산하

마루안 2021. 6. 29. 22:07

 

 

미자의 모자 - 이산하


시를 쓸 때마다 이창동 감독의 명화 <시>가 떠오른다.
잔잔한 강물 위로 엎어진 시체 하나가 떠내려온다.
하늘을 바로 보지 못하고 죽어서도 엎어져 있다.
멀리서 내 앞으로 운구하듯 천천히 다가오면
마침내 영화 제목이 수면 위에서 잔잔하게 일렁거린다.
시와 그리고 시체....
언제든 예기치 않은 것들이 내 앞으로 떠내려온다.
진실은 수면 아래에 숨어 있다는 듯 얼굴을 가리고
시는 생사가 같은 날이라는 듯 강물이 운구하고
그렇게 얼굴이 사라져야 비로소 실체가 드러난다는 듯
마지막으로 나에게 천천히 다가와 무심히 흘러간다.
처음부터 끝까지 강물이 표정을 바꾸지 않을지라도
단지 떠내려가는 것만 보여주는 게 시는 아닐지라도
결국 세상의 모든 시도 수면 아래로 내려가지 못하고
미자의 모자처럼 물에 새기듯 그렇게 흘러갈 것이다.


*시집/ 악의 평범성/ 창비

 

 

 

 



푸른빛 - 이산하


맑은 날 아버지가 연장을 꺼내와 숫돌을 갈았다.
목수답게 날이 녹슬기 전에 수시로 갈았다.
아버지의 표정이 가장 경건하고 고요한 순간이었다.
어린 나는 물컵을 들고 옆에 쪼그리고 앉아
숫돌 위로 물방울을 낙숫물처럼 똑똑 떨어뜨렸다.
날에 갈린 잿빛 녹물이 숫돌 아래로 흘러내렸다.
아버지는 가끔 벼린 날을 손끝으로 살살 쓰다듬었는데
그때마다 살이 베일 것 같아 내 얼굴이 찡그려졌다.

언제나 예리한 날의 마지막 관문은
날을 햇빛에 이러저리 비추며 나에게 묻는 것이었다.
"난 눈이 침침하니까 니가 봐. 뭐가 보여?"
나는 한쪽 눈을 질끈 감고 뚫어지게 날을 쳐다보았다.
역시 지난번처럼 푸른빛이 어렸다.
"파래요."
"하늘 말고."
"아 참, 칼날이라니까요."
"그럼 됐다."

약 40년이나 시를 썼지만
아직도 내 언어의 날에는 푸른빛이 어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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