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늙은 남자 - 임성용

마루안 2021. 6. 29. 21:55

 

 

늙은 남자 - 임성용

 

 

종각에서 종로 3가까지 서울의 도심 일대를

태극기를 든 늙은 남자들이 점령한다

 

늙은 남자가 탑골공원에서 성매매를 하려다 돌아선다

그럴 때면 눈이 먼 비둘기가 더 슬프다

 

술에 취해 비척거리는 우산을 보았다

우산을 버린 늙은 남자가 국밥을 먹고 어슬렁거린다

 

늙은 남자가 화를 내고 소리를 지르며 기세등등하다

젊은 사람들이 어쩔 줄 모르고 조심스레 피해 간다

 

주먹만 남은 눈동자가 흘러내린다

검은 버섯이 흘러내린 듯 골목이 질척인다

 

동구 밖 오래된 느티나무가 죽었다

넓고 다정한 그늘이 떠나고 막연한 계절이다

 

 

*시집/ 흐린 저녁의 말들/ 반걸음

 

 

 

 

 

 

적암 - 임성용 


강에서 태어난 안개는 여태 걷지 못하고
지난밤의 고요를 덮고 있었다 

버드나무에 가려 보이지 않던 사람 하나가
성긴 바람의 그물에서 빠져나와 손을 흔들었다 

적암까지 태워줄 수 있느냐고 물었다
아직 적암행 버스도 다니지 않는 이른 시간이었다 

쉰다섯이라고 했다
쉰다섯으로 뭉친 머리카락이 허름한 집을 짓고 있었다
쉰다섯에 어디 일자리 찾기가 쉬운 일이 아니죠 

염색공장을 나와 플라스틱 사출공장을 나와
도로포장 공사장에서 여름을 보냈다고 했다
돈을 못 받아 현장을 찾아왔다 가는 길이라고 했다 

적암에 가면 인삼밭에서 가을을 거뜬히 지낼 수 있지요
겨울이면 소나 돼지를 먹이는 농장 일이 그나마 낫지요
말을 더듬더듬 끊어 그는 빠진 앞니 하나를 보여주었다 

적암 가는 고갯길을 따라 끈질기게 기어오르는 안개
안개가 인도하는 숲을 지나 언덕 넘어 벼랑 끝까지 갔으나
적암이 어디인지 이름만큼이나 한없이 적막하고 멀었다


 

 

*시인의 말

 

사람들은 시에 늘 새로운 것을 바라고 전망을 요구한다.
내가 나조차 포장할 수 없는데, 그 안에 무얼 담겠는가.
언어의 성분과 삶의 질량을 생각한다.
나는 애초부터 어떤 불길한 기록에 사로잡혔다.
먼저 죽은 친구가 하늘에 별들을 그리고 있나?
그게 문득,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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