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줄 冊

네가 빌었던 소원이 나였으면 - 고태관 시집

마루안 2021. 7. 5. 22:12

 

 

 

이름 없는 시인의 시집이 긴 울림을 준다. <네가 빌었던 소원이 나였으면>은 고태관의 유고 시집이다. 며칠 간 이 시집을 손에서 놓지 못했다. 지하철에서도 틈틈히 펼쳐 한 편씩 읽는 맛이 대단했다.

 

처음 만난 시인일지라도 단 한 편만 읽고 빨려 들어가는 시가 있다. 이 시집이 그렇다. 오래 읽을수록, 여러 번 읽을수록 제 맛이 우러나는 좋은 시로 가득하다. 진공 청소기처럼 읽는 이를 빨아 들이는 묘한 흡인력이 있다.

 

단숨에 읽어 내려가다가 꼬리를 물고 따라 오는 여운 때문에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반복해서 읽게 만드는 시집이다. 고태관은 생전에 시인보다는 랩퍼로 알려졌다. 이 시집을 읽으면서 그가 시인이었고 그의 래퍼 활동도 알게 되었다.

 

시에 곡을 붙여 부르는 것이야 기존에 있었던 일이지만 시를 랩으로 부르는 것은 다소 생소하다. <트루베르>라는 팀에서 <피티컬>이란 이름을 달고 레퍼로 활동했다. 그는 정식 등단을 하지 않아 이 시집이 나오기 전까지 시인으로 불리지도 못했다.

 

생전에 시집을 내지 못했지만 이 시집의 무게는 웬만한 시집을 뛰어 넘는다. 이렇게 좋은 시가 알려지지 않았을까 의문이 들 정도다. 어쨌든 이제라도 만날 수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가. 유고 시집이어서일까. 시인의 짧은 생을 예감한 듯 느껴지는 시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소실점 - 고태관

물결 위로 넘치는 석양
괜한 돌멩이나 내던지면 얕아진 강물이 눈망울로 번져 와
멀리 빈집으로 쓸려 가네

아득하도록 붉게 고인 하류에서는
무성한 넝쿨로 엉키는 얼굴들
바다에 닿기 직전 급하게 불어 오르네

오늘 일기를 미뤄 둔 새들이
낮은 바람 박차고 돌아갈 채비를 서두르는데
발목 다 젖은 미명을 들쳐 업고 돌아가는 다리 아랫길

멀리서 흐릿하게 떠오른 어머니
내가 닿아야 할 별 하나
깜박하고 켜진다

 

 

몇 억 명의 확률을 뚫고 세상에 나와 짧은 삶을 마치고 떠났지만 이렇게 좋은 시집 하나를 떨구고 간 시인이 고맙다. 사람은 망각의 동물이라 언젠가는 이 시인도 잊혀진 사람이 되겠지만 자주 읽혀지는 사람으로 남지 않을까. 다 좋은 시를 남긴 덕분이다.

 

망자에겐 그 어떤 말도 위로가 되진 않겠으나 이렇게 사무친 시집 하나가 나를 살아 있게 한다. 지긋지긋한 이 망할 놈의 코로나 때문에 지친 심신을 위로한다. 시의 쓸모가 제대로 능력을 발휘하고 있다.

 

시집 하나 추천해 주실래요? 내 주변에는 시집보다 삼겹살에 소주를 좋아하는 사람이 더 많기에 이런 사람은 없을 것이나, 그래도 행여 누군가 시집 추천을 물어 온다면 주저없이 이 시집을 권하고 싶다. 

 

 

*피티컬의 목소리에 실린 시들은 굉음을 내며 떨어지는 폭포였고 잔잔하게 가슴을 적시는 가랑비였으며, 구름을 걷는 듯한 가벼운 발걸음이었고 입속에서 맴도는 속삭임이었다. 그가 노래로 읊은 시를 속으로 가만히 따라 하고 있으면 핏줄 속으로 시어들이 흘러가는 것 같았다. 누구보다 시를 사랑하는 여린 마음이 있었기에 그는 언제나 웃으며 노래했고, 그것은 그가 쓴 시 속에 오롯이 담겨 있다. 덧니를 드러내며, 어, 형, 잘 지내셨어요, 하며 안부를 물을 때를 나는 좋아했다.

 

*신철규 시인의 회고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