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로봇 0호 - 윤석정

마루안 2021. 6. 27. 19:16

 

 

로봇 0호 - 윤석정

 

 

오십 살 영호 씨는 공허 속의 고물,

버린 짐짝 같은 흉물이 됐다

주물공장이 헛물켜던 때부터였다

영호 씨의 관절이 움직였던 모터가 멈췄다

모터에서 번쩍 수백만 볼트의 불꽃이 터졌다

사랑의 기억장치가 리셋됐다

영호 씨 모터를 누볐던 기름이 제자리에 멈췄다

기름 한 방울 한 방울 가슴 언저리로 새어 나왔고

영호 씨는 급속도로 녹슬었다

최신의 모터를 장착했던 첨단의 과거

영호 씨는 사랑의 형식을 반복하여 생산했고

주물공장은 모든 형식에는 유행이 있다고 했다

유행이 지나면 다른 유행으로 대체되고

또 다른 영호 씨로 교체되는 시스템 속에서

영호 씨의 기억장치는 해당 사항이 없었다

영호 씨는 반복의 형식을 반복할 뿐

반복되지 않는 사랑의 형식이 주입된 적이 없었다

사랑을 포기한 사람처럼

비에 젖지 않는 공기처럼

오십 살 영호 씨가 주물공장 뒤란에 있다

 

 

*시집/ 누가 우리의 안부를 묻지 않아도/ 걷는사람

 

 

 

 

 

 

달 스위치 - 윤석정

 

 

달에 가 봤다는 사내

달덩이 안고 노숙을 한다

허풍이 잠꼬대처럼 풀어진다

 

달에 가 봤다는 사내

소주병을 한눈에 갖다 대더니

달에서 바라본 지구가 한눈에 그득해

달은 초호화 저택 같았다 너스레를 떤다

 

달에 가 봤다는 사내

너른 달 방에서 혼자 지내기 너무 외롭고 쓸쓸해

다시 지구로 돌아왔다 고백을 한다

 

달에 가 봤다는 사내

허풍 그득한 배꼽이 스위치처럼 드러난다

시커멓게 그을린 스위치를 누르면

달덩이가 사르르 녹아 빛을 낼 것 같다

 

달에 가 봤다는 사내

달 스위치를 끄고 잠꼬대를 풀어낸다

누운 자리가 달 방보다 더 안락했는지

허풍처럼 코를 곤다

 

 

 

 

# 윤석정 시인은 1977년 전북 장수 출생으로 원광대 국문과, 중앙대 대학원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2005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당선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오페라 미용실>, <누가 우리의 안부를 묻지 않아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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