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뿌리 독한 한 송이 꽃 - 정기복

마루안 2021. 6. 20. 19:26

 

 

뿌리 독한 한 송이 꽃 - 정기복


열다섯 이후
불러보지 못한 아버지
황토밭머리 삭은 수숫대로 누운 채
흙살 풀리는 이른 봄이면
뼈마디 뒤척여
한 송이 꽃 스무 해나 피워 올린다
살 썩히고도 다 하지 못한
사모(思母)의 정이
저리도 뼈저리게 고개 숙인 자줏빛일까
식솔 다 거두지 못한 미련이
이리도 시린 향기일까

죽음을 먹고 자라
살아 있음의 통증을 확인시키는
맨 처음 지상의 슬픈 일
나를 세상에 있게 한
저 빛깔 보노라면
울렁이는 황토, 울렁이는 하늘
가슴마저 울렁이게 하는
꽃의 떨림, 꽃의 분출
살아 모진 바람이었던 아버지
뿌리 독한 꽃 한 송이
뽀-옥 피워 올린다

할미꽃,
몇 광년, 어느 행성에서 온 별똥별이면
나 꽃 피워 올릴 수 있을까?


*시집/ 어떤 청혼/ 실천문학사

 

 

 




모란공원, 여름 - 정기복


풀쐐기 떡갈나무 잎사귀에 붙어
방해꾼 살갗을 경계하며
한 끼 고단한 식사를 마치는 때

온몸으로 울던 매미소리 그치고
노래를 가진 모든 풀벌레들이
일시에 귀를 닫아버리는 정적의 순간

먹구름 갈라
천둥 울고
번개 쳐 내립니다

벌에 쏘인 듯 찌르르 울리던
놀란 손 얼떨결에
나뭇가지 하나 움켜잡습니다

허공에 숨어지내던 천둥 번개도
사시장철 풀과 나무를 기르는
땅에 와서야 존재를 드러냄을

힘껏 내리쳐 알곡 쭉정이 갈라놓던
도리깨 물푸레나무 잡고서야
꺾이지 않는 죽음, 장대비에 적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