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개의 취향 - 정선희
앞이 보이지 않는다
안개 때문이야, 당신은 실망한 듯 말했고
먼 곳이 더 잘 보일지도 모른다고 나는 말했다
나의 체온이 당신의 지표면보다 차가운 경우
물방울이 당신의 심중 어딘가에 맺혀 시야가 흐릿해지는 현상
나와 당신 관계 그런 말은 몰라도 좋아
나를 낯선 곳으로 데려가서
조금 더 높은 곳으로 끌어올리는 영혼의 매개체, 뭐 그런 말도 말고
내가 배롱나무에 붉은 전세를 들거나
이런 말이 이해가 되는 편이지
알고 있지만 모르는 이야기
나는 좀 모호한 것들이 좋아
내가 꽃이나 나비가 되기도 하고
안은 밖이 되기도 하는
무엇보다도
안개 때문에 나는 통유리인 당신을 넘기도 하고 지우기도 하고
*시집/ 아직 자라지 않은 아이가 많았다/ 상상인
환상통 - 정선희
그는 낮게 풀처럼 앉아 기타를 쳤다 손가락이 긴 남자는 믿지 말라는 엄마의 말은 틀렸다고 생각했다 그는 내게서 확인되지 않은 손가락 끝의 계절을 따라갔다 옅어질 대로 옅어져 한 번도 불을 끄지 않은 방에서 나는 손가락이 긴 아이를 낳고 결국 엄마처럼 되었다 어릴 적부터 귀에 못이 박히게 듣던 말 아버지도 손가락이 길어서 집에 오지 않았다던 엄마는 지금도 누군가 문을 두드릴까 빗소리 바람 소리에 귀를 곧춘다고 했다 나 때문에 엄마의 슬픔엔 이름이 많다 후드득 창문을 두드리는 물방울 소리, 그를 위해 지워지지 않는 화장을 한다
# 정선희 시인은 경남 진주 출생으로 2012년 <문학과의식>, 2013년 강원일보 신춘문예 당선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푸른 빛이 걸어왔다>, <아직 자라지 않은 아이가 많았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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