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환절기 - 이용호

마루안 2021. 5. 26. 22:35

 

 

환절기 - 이용호

 

 

한때 당당하던 그의 지문은 간 데가 없다

슬그머니 개인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버린

손가락의 무늬를 그리워하다가 새벽 첫 버스를 놓쳤다

마지막 회를 향해 가는 드라마의 주인공처럼

인력 소개소를 향해 전력 질주한다

새벽 추위에 떨고 있던 개 한 마리

시선이 그와 마주치자 맹렬하게도 짖어댄다

 

아침부터 소주잔이 급속하게 이동한다

아픈 만큼 마시는 건지 마셔서 아픈 건지

모를 사람들이 피워 놓은 장작불 속에서

서로를 외면하던 눈동자들이 서럽게 울어 대기 시작한다

주민등록증을 건네고 하루를 저당 잡히는

그의 한숨 소리가 사무소 계단에 쌓여 갔다

 

여기저기 떨어진 단풍잎들은 저마다의 하루를 계산해 본다

그도 이번 생에 이루지 못한 것들의 목록을 적어 보다가

다음 생에서는 어떤 목록을 가진 이파리로 나무에 매달릴까

과연 몸 하나 누울 집 한 채 등기 낼 수 있을까

생각할수록 눈에는 힘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한 끼의 식량을 얻기 위해서는

기나긴 침묵의 터널을 통과할 수 있어야 했다

끝내 호명하지 못한 일꾼들은 가슴마다 술잔을 얹어 두었다

소개소 앞을 서성거리던 봉두난발의 사내들 흩어져

남구로역으로 가리봉동으로 취생몽사하는 아침

 

중심을 비껴간 사내들이

하늘에 가깝게 올랐다가 추락한 가장들이

술병을 집어 던지며 흐느끼고 있다

결말을 낼 수 없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

철 지난 계절에도 또 누군가는 자기 몸을 바꾸고 있다

 

 

*시집/ 팔순의 어머니께서 아들의 시집을 읽으시네/ 실천문학사

 

 

 

 

 

 

눈사람 - 이용호

 

 

어떻게든 일어서서 끝까지 달려보고 싶은 것이다

수많은 날 내리는 하얀 적막들 가운데에서

그가 내뱉었던 말들이 비수가 되어 꽂히더라도

어쨌든 나는 다시 일어나서 걸어보고 싶은 것이다

마지막으로 나를 기억해 주는 사람들이 떠나간 벌판 위에서도

중력을 이기지 못해 떨어지는 지상의 모든 것들이

스스로의 설움으로 물들어 가더라도

이보다 더한 눈송이쯤 젖어오는 게 대수랴 싶다가도

먼저 떠나간 짐승들이 그리워지는 밤이 오면

새들의 날개 위에 내려오는 숱한 어둠까지도

내 생애의 절벽으로 받아들일 수만 있다면

나는 좋다고 이 밤에도 또 생각해 보는 것이다

전생에 그 어떤 것들이 새롭게 태어난다 하더라도

침묵 속에서 떨고 있을 별들의 사라짐을 혼자서 보노라면

침몰하는 것들이 반드시 아름답지 않음을 느낄 수 있고

저 멀리 숲속에서 울려오는 새들의 울음소리들도

한 뼘의 걱정으로만 낡아가는 것을 들을 수 있다

모두가 귀환하는 저녁의 어스름이 오면

누군가 내 겨드랑이에 꽂아 놓은 나뭇가지 손으로

제 이름을 부르며 떨어지는 노을의 포효가 새겨져 갈 때

세상에는 저 혼자 견뎌야 하는 적막 또한 조금은 있음을

이제는 알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 보는 것이다

숱한 걱정들이 내려앉는 곳이라면 어디에서든지

최후의 잎사귀들은 낙하하는 눈송이의 속도로 젖어들고

끝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은 언제나

내가 적중시키고자 했던 과녁 되어 스스로 떨고 있을 것이다

 

 

 

 

 

# 이용호 시인은 서울 출생으로 2010년 계간 <불교문예> 신인상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유배된 자는 말이 많다>, <내 안에 타오르던 그대의 한 생애>, <팔순의 어머니께서 아들의 시집을 읽으시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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