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폐업 신고 하던 날 - 김선향

마루안 2021. 5. 17. 22:13

 

 

폐업 신고 하던 날 - 김선향


수원세무서 앞
일찍 떨어진 은행잎들이 갈피를 못 잡고

폐업 사유를 묻고 무실적이라 답하고
임무는 싱겁게 끝나고

하루에도 얼마나 많은 가게가
문을 닫고 개업을 하고
다시 망해 나가떨어지는가

나도 예외는 아니다

작정한 것도 아닌데 네 발길은
하노이에서 온 도티화이네 쌀국숫집에 닿았다
한중일 안마소로 간판이 바뀌었다

마침 안마를 받고 나오던 늙은 남자의
상기된 눈과 마주쳤다

쌀국숫집 대신
한중일 안마소는 문전성시를 이루는 걸까

비가 내려 공치는 날이면
진종일 고향의 음식으로
이를테면 부화 직전의 삶을 달걀을 안주 삼아
향수를 달래던 이주노동자들

그들
토란잎 같은 미소가 생생하다

그때 술 한잔 받을 것을
그 선의를 왜 마다했을까

폐업 신고를 하고
사라진 쌀국숫집 처마에 서서

발치에 밀려온 은행잎을
오래도록 헤아린다

토란잎 같은 그 미소를 떠올리자
나는 그 큰 잎에 구르는 빗방울이 된다


*시집/ F등급 영화/ 삶창

 

 

 




곰보 삼촌 - 김선향


가을장마가 장쾌하게 지나간 아침
느닷없이 떠오른 그 남자
한 이십 년쯤 지났을까

조무래기들은 곰보 삼촌이라 불렀고
사이가 벌어진 어른들은
곰보딱지라며 업신여겼다

천연두 자국인지 박박 얽은 얼굴

작달막한 키에 날품을 팔아 먹고사는
배운 것도 없는 지지리도 못난 사내

애 못 낳는 어머니뻘 과부와 정분났다는 소문
파다해지자 돌연사한 그 남자
까마득한 기억을 장맛비가 몰고 온 걸까

요즘은 어디서도 보기 힘든 곰보
이름이 뭐더라 생각해봐도 가물거리는
우리 막내 삼촌

세상 손가락질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바보 같은 사랑을 하며 사는 것처럼 살았던
명이 인중처럼 짧았던 그 남자




# 김선향 시인은 충남 논산 출생으로 충남대 국문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2005년 <실천문학> 신인상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여자의 정면>, <F등급 영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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