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줄 冊

칸트의 산책로 - 최준 시집

마루안 2021. 5. 16. 19:35

 

 

 

근래 보기 드물게 여러 번 읽으며 음미할 시집 하나를 발견했다. 바로 최준의 <칸트의 산책로>다. 다섯 번째 시집이다. 시인은 경희대 재학 중이던 1984년 등단했으니 37년 전이다. 그 동안의 시집이 다섯 권이면 아주 게으른 시 쓰기다. 이 시집도 네 번째 이후 11년 만에 나왔다.

 

비주류에 더 눈길이 가는 성격이라 시집도 덜 주목 받는 출판사 시집에 관심이 많다. 최준 시집을 발견했을 때도 그랬다. 이 시인 소문도 없이 오랜만에 시집을 냈구나였다. 황금알에서 가끔 좋은 시집을 만나기는 했어도 최준 시집은 유독 반가움이 앞섰다.

 

예전에 누군가 최준의 시를 해설하면서 그를 천재 시인이라 했다. 그때 든 생각은 이 사람이 무슨 李箱이라도 된다는 걸까. 시를 잘 쓴다고는 생각했지만 천재까지는 아닌데였다. 그러나 이 시집 <칸트의 산책로>를 읽고는 반박 불가다.

 

밥 나올 일 없는 시인의 찬사는 필요 없다. 단지 공감이 가는 시로 가득한 시집을 설레는 마음으로 읽었다는 것으로 대신한다. 밥벌이와 시 쓰기의 경계에서 위태위태하게 살아 온 시인의 시 나이테가 촘촘하고 단단해졌다.

 

나이는 가만히 있어도 저절로 먹지만 詩 나이는 저절로 먹어지지 않는다. 시인이라고 나이를 안 먹겠는가. 나무가 온갖 비바람을 이겨내고 채움과 비움을 반복하며 나이테를 늘려 가듯이 이 시인의 詩輪도 마찬가지다.

 

1963년 출생인 최준 시인은 환갑이 가까워오면서 시가 더욱 완숙해졌다. 특유의 서정성은 여전하고 군더더기 덜어낸 싯구는 더욱 밀도가 높아졌다. 그것이 독자를 끌어 당기고 여러 번 읽게 만드는 힘이다. 詩齡과 詩輪의 차이랄까.

 

詩齡이 담는 데만 급급한 게으른 나이 먹기라면 詩輪은 채움과 비움을 반복하는 부지런한 나이 먹기다. 깎고 다듬어서 비워진 연륜과 게을러서 채워지지 않은 연륜은 다르다. 원로 시인 중 좋았던 초기 시에 비해 나이 들면서 점점 시들시들해진 시를 쓰는 경우가 있지 않던가.

 

최준의 시는 이번 시집이 가장 완성도가 높다. 이 시집에는 근래에 쓴 따끈한 시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근 10여 년 전에 발표한 시도 실렸지만 지금 읽어도 전혀 구린 맛이 나지 않는다. 유통기한이 긴 시임을 알 수 있다. 이것도 최준 시인만이 갖고 있는 일종의 시의 힘이다.

 

20년 후에 읽어도 새로운 맛이 날 것이다. 시집 앞 부분은 나중 먹기 위해 아껴두고 뒷 부분에 미련이 남는 시가 있어 몇 줄 옮긴다. 가방에 넣고 다니며 틈틈히 한두 편씩 읽어도 좋겠다. 쉼표 하나에서도 긴 여운이 남는 좋은 시집이다.

 

 

나는, 새

 

설령, 날아가는 구름을 다독거려 잠재우는 법을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 해도

 

허공은 영원한 의문

없다, 하면 내가 지워지고

있다, 하면 세계가 지워지는

 

(중략)

 

날개 접는 일은

노래를 끝내는 시간과 같아

나, 이제부터 오늘을 다시 집 지어야 하리

세상 너머에서

하루만 더 살아남기 위해

 

*시, <새의 실종> 일부

 

 

이제 막 터널을 빠져나온 바퀴처럼

 

죽기 전에 가야만 할 데가 있는 것처럼

 

(중략)

 

그런데 나, 여직 멀쩡히 살아 있는 것처럼

 

살아서 아픔의 힘으로 무언가 해야 할 거라도 있는 것처럼

 

살아 있으니 살아야 한다는 헛말이라도

 

당신에게 건네고 싶은 것처럼

 

*시, <미련> 일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