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줄 冊

어린 왕자로부터 새드 무비 - 박남준 시집

마루안 2021. 5. 21. 21:42

 

 

 

박남준 시인이 여덟 번째 시집을 냈다. 1984년 시 전문지 <시인>에 작품을 발표하면서 문단에 나왔으니 등단 37년이 되었다. 그 세월을 온전히 담아낸 시집이 총 여덟 권이다. 나는 그가 냈다는 몇 권의 산문집은 읽어본 적이 없다.

 

그래도 그가 낸 시집 여덟 권은 빼 놓지 않고 읽었다. 초기 시부터 현재까지 그의 시풍을 온전히 느낀 셈이다. 내가 박남준 시집을 처음 만난 건 두 번째 시집으로 <푸른숲>이라는 출판사에서 나온 <풀여치의 노래>다. 얼음장처럼 서늘하게 스치는 맑은 싯구에서 슬픔이 뚝뚝 묻어났다.

 

시에 눈도 뜨도 못했던 내가 이 시집을 읽게 된 것은 우연히 <금호문화>라는 그룹 사보에 실린 모악산방 소식과 시인의 인터뷰를 보면서다. 허무주의가 사무치도록 온 몸에 박힌 사람이었다. 그때 느낀 생각이 이 사람 오래 살지 못하겠구나였다. 

 

풀여치의 노래를 읽고 첫 시집인 <세상의 길가에 나무가 되어>를 찾아 읽었고 얼마 후였던가 세 번째 시집인 <그 숲에 새를 묻지 못한 사람이 있다>을 읽으면서 이 시인을 가슴에 담는다. 시집을 읽으며 곧 죽을지 모를 시인을 만나고 싶었는데 잊고 지냈다.

 

그때만 해도 박남준 시인은 무명이었다. 틈만 나면 가랑잎처럼 떠돌던 시절이라 어느 늦가을 금산사를 들러 모악산을 올랐다가 문득 잡지에서 봤던 시인이 생각났다. 나는 모악산을 내려가 시인의 거처를 찾았다.

 

마을에서 조금 떨어져 있는 무당이 살다가 떠난 외딴집이었다. 시인은 없고 홍시가 매달린 감나무에서 청설모만 바쁘게 오르내렸다. 소주병이 쌓인 마당가에 한참을 앉아 있다 메모를 남기고 떠났다.

 

몇 달 후 그가 인사동에서 전화를 했다. 그때 나는 남원 실상사를 여행중이었다. 나중 내가 모악산방을 갔을 때는 시인이 부재중이었다. 몇 번의 어긋남 뒤로 딱 한 번 시인을 만났다. 첼로 음악이 흐르는 모악산방 온돌방에서 차를 마시고 나왔다.

 

서울 가는 기차 시간에 맞춰야 했기에 오래 머물 수 없었다. 시인이 전주에 볼 일이 있다면서 함께 버스를 타고 전주까지 배웅을 했다. 이후 밑바닥을 기며 살던 내가 살길을 찾아 외국으로 떠났고 15년 가량 살다 돌아왔다. 

 

그의 시집이 나올 때마다 꼬박꼬박 인연의 끈을 놓지 않았지만 나는 박남준 시인의 대표 시집으로 <그 숲에 새를 묻지 못한 사람이 있다>와 네 번째 시집인 <다만 흘러가는 것들을 듣는다>를 꼽는다. 이후 시인은 모악산방을 떠나 지리산 아래로 거처를 옮긴다.

 

이번 시집 <어린 왕자로부터 새드, 무비>도 주옥 같은 시들로 가득하다. 내가 워낙 그의 초기시에서 받은 감동이 커서 그만큼의 감동은 아니지만 오래 음미할 시를 여러 편 가슴에 담는다. 이제 시인을 찾아 갈 일은 없을 것이다. 그늘에서 더 빛이나는 시 한 편을 옮긴다.

 

 

동백의 여백 - 박남준


동박새가 찾아와 쉴 자리가
동백의 여백이다
그늘을 견딜 수 없는 숙명도 있지만
다른 나무의 그늘에 들어야
잎과 꽃의 여백을 만드는 나무가 있다
동백의 여백을 생각한다
혼자 남은 동백은
지독하도록 촘촘하게
모든 여백을 다 지워서
가지를 뻗고 잎을 매달아
그 아래 올 어린 동백의 그늘을 만든다
곁에 다가와 노래하는 자리가

그 사람의 여백일 것이다

여백을 가지고 있는가

누군가의 여백을 위해 스스로

그늘을 가득 채워 버렸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