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꽃 진 자리에서 꽃을 기다리다 - 피재현

마루안 2021. 5. 16. 19:18

 

 

꽃 진 자리에서 꽃을 기다리다 - 피재현

 

 

꽃 진 자리에서 꽃을 기다리는 시간

슬픔이 아주 천천히 말라가는 시간

울컥! 할 수도 있겠으나 그냥 또

떨어진 꽃잎 세다보면 기어이는 잊을 수도 있을

허기가 슬픔을 이기는, 기차의 행선지가 궁금해지는

그런 순간은 언제나 슬픔이 끝난 시간에

조금은 아린 혀끝으로 오려니

꽃 진 자리에 돋아나는 초록의 할거에도

질기게 슬픔을 이긴 시간이 묻어 있으려니

 

 

*시집, 우는 시간, 애지출판

 

 

 

 

 

 

장지(葬地)에서 - 피재현

 

 

기다리는 내내

살아온 날들이 허망하여 나는

내 생애를 입체적으로 보기로 했다

그렇다 그것은

기다림은 어떤 예정된 것이었다

바람 속에 묻어 온 홀씨는

제 무게를 못 이겨 휩쓸리다 날리다

겨우 산비탈 돌 조각에 끼여

봄을 기다린다

나의 생애, 혹은 그 긴 바람의 여행이

잠시 머물러 있는 지금, 나는 일탈을 꿈꾼다

산 갈대 서걱대는 소리에 골을 타고 오던

바람은 제 길을 잃고 서성대다

슬그머니 꼬리를 감추고

떡갈나무, 곰솔나무, 늦도록 열매를 떨구지 못한

산돌배나무, 살 붉은 찔레, 노박덩쿨, 가막살나무

우두커니 제 자리에 서서

나의 생애, 살아온 날들의 나이테가 된다

언제 한번 저 바람처럼

소리 없이 휘날려 본 적 있는가

언제 한번 저 소나무처럼 뿌리를

가져 본 적 있는가

 

 

 

 

# 피재현 시인은 1967년 경북 안동 출생으로 1999년 계간 <사람의문학> 신인 추천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우는 시간>, <원더우먼 윤채선>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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