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멀리 있는 빛 - 이산하

마루안 2021. 5. 12. 21:47

 

 

멀리 있는 빛 - 이산하


친구가 감옥에 박경리의 대하소설 <토지> 한 질을 보냈다.
책을 전부 바닥에 펼쳐놓자 작은 독방이 토지로 변했다.
난 그 광활한 토지에 씨앗 대신 나를 뿌리며 장례식을 치렀다.
대학시절 시인지망생이었던 그에게 난
박상륭의 소설 <죽음의 한 연구>를 선물한 적이 있었다.
연쇄살인 뒤 나무 위에서 자진하는 주인공의 최후를 보며
그 도저한 비장미에 우리는 실성한 것처럼 얼마나 압도되었던가.
'한라산 필화사건' 수배 때도 인터뷰로 여러 번 은밀히 만났다.
내가 석방되자 '시운동' 동인들의 '이륭 석방환영회'에서
그가 축가로 김영동의 노래 <멀리 있는 빛>을 불렀다.
어둠은 가까이 있고 빛은 멀리 있는 처연한 노래였다.
깊은 강 같은 노래의 행간이 진짜 노래였다.

29살 그의 눈빛은 심야극장에서 어둠보다 더 어두워졌다.
무엇을 본다는 것은 가만히 눈을 허용하는 것에서 비롯된다.
그에게 이 세계는 처음부터 폐허였고
산다는 것은 폐허 속의 마지막 잔해를 몇줌 거두는 일이었다.
모두 장미빛 꿈의 복선을 적당히 깔며 정서적 타협을 할 때
그는 그런 위선과 기만을 거부했다.
우리 시대의 꿈은 90%가 자본의 덫이다.
이번 기일에는 장밋빛 미래의 덫에 걸린 모든 영혼들을 불러 모아
그 광활한 토지에서 다시 장례식을 치르고 싶다.
그날의 상주는 '입 속의 검은 입'이고 문상객은 잿더미들이다.


*시집/ 악의 평범성/ 창비

 

 

 

 

 


욕조 - 이산하


어렸을 때는 겨울 저수지에 빠져
간신히 죽다가 살았고
젊었을 때는 욕조에 빠져 평생 먹을 물을
하루에 다 먹은 적이 있었다.
헌법이 태어난 넓이 107x60cm, 깊이 50cm
그 이후 이 세상은 작은 욕조였고
이 세상에서 가장 깊은 곳도 욕조였다.

어느날 우연히 길거리 모조품 노점상에서
내 영혼이 감전될 것 같은게 눈에 띄었다.
금방이라도 악의 평범성을 증명할 것 같은
자코메티의 조각상<걷는 사람>이었는데
난 얼른 운구해 빈 욕조 안으로 입관했다.
그때부터 욕조가 봉쇄수도원으로 바뀌었다.


 


# 이산하 시인은 1960년 경북 영일 출생으로 경희대 국문과를 졸업했다. 1982년 필명 '이륭'으로 <시운동>에 연작시 <존재의 놀이>를 발표하며 등단했다. 시집으로 <한라산>, <천둥 같은 그리움으로>가 있다. <악의 평범성>은 22년 만에 나온 그의 세 번째 시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