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버리지 못하는 게 희망뿐이랴 - 정기복

마루안 2021. 5. 11. 22:12

 

 

버리지 못하는 게 희망뿐이랴 - 정기복


희망을 버리지 못해 여기 왔다
떼어버리지 못한 갈증을
소주잔에 저당잡힌 채
절망을 불러모았다

흉어의 바다를 딛고 정박한 배
하선을 서두른 선원 몇이
완월동 오촉 전구 아래서
폭풍의 품값을 탕진하도록
꺼질 듯 꺼질 듯 꺼지지 않는 남풋불이
항구의 세월을 그을렸다

부두를 헤집던 비린 바람이
습기 찬 손길로 달려드는 자정
절망을 포기하는 게 술값 치르는 것처럼
쉬운 계산이라면 또 모른다
주머니 속 구겨진 지폐를 꺼내놓듯
살아갈 길 다림질할 수 있다면....
버리지 못하는 게 어디 희망뿐이랴


*시집/ 어떤 청혼/ 실천문학사

 

 

 




모란공원, 봄 - 정기복


이곳에 오면 오래 걷지 않아도
흙살이 제 혼자 풀림을 금방 압니다
겨우내 언 땅 속에
얼지 않은 들꽃 씨앗과 애벌레 알들이
도란도란 계절을 준비함을
북어 대가리 소수 한 잔 뿌리고 알았습니다
오래 살아 아름다운 당신이 그립습니다
누구에게나 봄은 봄이지만
씨앗 하나 온전히 움 틔우는 자의 봄이
향기로운 봄임을 절 올려 배웁니다
썩지 않으려는 당당한 추태보다
스스로 썩어 흙살 되는 당신의 생애를 사랑합니다
이곳에 오면
흙과 살이 만나 새 세상 가꾸는
씨앗을 가슴에 잉태합니다




# 정기복 시인은 1965년 충북 단양 출생으로 강릉대 국문과를 졸업했다. 1993년 광주대 <대밭문학상>, 동아대 <동아문학상>을 수상했다. 1994년 <실천문학> 겨울호에 시를 발표하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어떤 청혼>, <나리꽃이 내게 이르기를>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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