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등피 닦던 날 - 이형권

마루안 2021. 5. 10. 19:43

 

 

등피 닦던 날 - 이형권


등피를 닦던 날이 있었습니다
나직이 입김을 불어 그을음을 닦아내면
허공처럼 투명해져 낯빛이 드러나고
그런 날 밤 어머니의 등불은
먼 곳에서도 금세 찾아낼 수가 있었습니다
그믐날
동네 여자들은 모두 바다로 가고
물썬 개펄에는
거미처럼 움직이는 불빛들로 가득했습니다
어둠 속에서 보는 바다는
분꽃 향기 나던 누이들의 가슴처럼 싱그럽고
조무래기들은 모닥불을 피우고
북두칠성이 거꾸로 선 북쪽 하늘을 향해
꿈을 쏘아 올렸습니다.
묵은 시간의 표피를 벗겨내듯이
밤하늘에는 알 수 없는 이야기들이 가득했고
범바우골 부엉이가 울고 가도록
어머니의 칠게잡이는 끝이 없었습니다


*시집/ 칠산바다/ 문학들

 

 

 

 

 

 

범태상회 - 이형권

 

아버지가 열무김치에 쓴 소주를 마시던 곳이다

곰살궂게 쫀득거리던 고무과자에 군침을 흘리다가

기어이 호주머니 속 달걀 두 알과 바꾸어 먹던 곳

학용품도 팔고, 담배도 팔고, 막걸리도 팔고,

백 점을 맞을 수 있다는 선생님의 전과도 팔던 곳

더러는 눈깔사탕을 훔쳐 먹었다는 무용담이 있었다

참새 떼가 모이던 방앗간처럼

조무래기 떼 떠들썩한 하굣길이면

목발을 짚은 상이군인 아저씨가

새초롬한 눈빛으로 째려보던 곳

국숫발처럼 얘깃거리가 쏟아져 나오는
중앙이라 불렸던 면 소재지의 점빵
지금은 어느 갯가 폐선처럼 쓸쓸하다
인기척도 없이 수북이 먼지만이 쌓이고
가설극장 포스터처럼 빛바랜 추억이 스친다
농협창고가 보이는 텅 빈 거리에서
우리 집 나락 가마니에 일등을 주지 않았다고
아버지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술에 취해 걸어오시는 것이다

 

 

 

 

# 이형권 시인은 1962년 전남 해남 출생으로 전남대 국문과와 동국대 대학원을 졸업했다. 1990년 진보 문예지 <녹두꽃>과 <사상문예운동>에 시를 발표하며 등단했다. <칠산바다>는 30년 만에 나온 첫 시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