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나지막이 부드럽게 - 김태완

마루안 2021. 5. 10. 19:25

 

 

나지막이 부드럽게 - 김태완


무거운 몸
이라고 생각하니 더 무거운 몸

부는 바람도 버겁다

걸음은 짧아지고
생각은 깊어지고

평생을 살아도 알 수 없는 길에서

비는 길게 내리고
흘러온 바다 요동치며 뿌리를 흔든다

나 그만 갈래
엄마, 나 그만 가면 안 돼?

나지막이 부드러운 음성
마음을 다독이는 소리

먹먹한 가슴으로 보이는 저기 저 불빛
그래도 가자, 꼭 잡은 손이 따뜻하다

무거운 몸, 일으키니
나지막이 빛 고운 야생화
언제부터 있었던가.


*시집/ 아무 눈물이나 틀어줘/ 북인

 

 

 



꿀, 벌 - 김태완


한 무리의 벌 떼

꽃이란 꽃은 모두 움츠린다.

벌은 꿀이 될 수 있을까
혹은 꿀로 벌이 될 수 있을까

마지막이 되어서야 고개를 숙였다. 그 뻣뻣하던 위장을 낮추며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이 자세는 인정한다는 뜻과 이걸로 마무리하자는 뜻을 동시에 나타내는 형용사 같은 것이었다. 동사가 형용사가 되는 문장은 자연스럽게 읽혀지고 은닉된 상징은 벌들의 마을로 향하고 있었다.

벌이 있는 곳에
유혹 같은 달콤한 꽃이 있었다.

벌 떼 우르르 꽃으로 달려들었지만
꽃들은 여전히 무사했다.

무죄다.


 


# 김태완 시인은 충북 청원에서 태어나 신탄진에서 성장했다. 2000년 계간 <오늘의문학>에 시가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추억 속의 겨울은 춥지 않다>, <마른 풀잎의 뚝심>, <왼쪽 사람>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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