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시간은 마디를 가졌다 - 오두섭

마루안 2021. 5. 1. 19:15

 

 

시간은 마디를 가졌다 - 오두섭

 

 

뚝뚝 잘려지는 마디가 몸 어디에 붙어 있는 게 분명하다.

시간은, 날개를 달았을 뿐인데

 

그 날개인 듯

창문을 뚫은 햇빛을 타고 들어와 내 앞에 툭 떨어진 벌레 한 마리

 

파르르, 불시착의 날개를 접고는 꿈쩍 않는다.

등딱지가 꽤 무거워 보인다.

 

그러고 보니,

여러 개의 팔다리와 무척이나 민감한 촉수, 숨 가쁜 핏줄들

하지만 후진하는 날개는 없는 낌새다.

 

불현듯 내려다보니,

햇빛의 울타리가 아까보다는 조금 좁혀진 듯하다.

내 쪽에서는, 분명 차 한 잔 데워질 무렵

 

저 벌레는 아직껏 햇빛 위에 그대로다.

 

내가 못 본 사이 몇 걸음 걸어갔던 것, 햇빛을 따라갔거나,

아니면 피해갔거나,

 

자기 생의 한 고비를 가까스로 넘겼을 시간

 

내가 졸음에서 다시 책갈피를 여는 오후 2시쯤

 

 

*시집/ 내 머릿속에서 추출한 사소한 목록들/ 문학의전당

 

 

 

 

 

 

나무에는 길의 유전자가 있다 - 오두섭

 

 

아득한 그곳에 길은 안 보였다

활엽수 낙엽들이 원주민마냥 터를 잡고

 

수상한 들녘에서

저 너머 보이지 않는 숲을 향해

바람의 길을 살펴보는 나무들이 있었다

 

눈먼 사람들 하나 둘 모여들고

발길이 가고자 하는 그곳으로

꼬불꼬불 이어지는 것이 되었으면 했다

 

어느 날 아침 강줄기 하나가 뿌리로 빨려들어 갔다

두려움으로 내딛는 첫 발걸음

그렇게 앞서 간 발자국을 밟아서

 

길 하나 놓아진다면

끝을 모르는 그곳이 우리의 목적지라면

어린 나무들이 길이 생기는 곳으로

줄지어 따라나섰을 것이다

 

그러고만 싶은 나무들은

목을 길게 뻬고서는

온종일 벌판을 바라보고 있는데

 

저 먼 한 곳에서 어떤 사람이

일몰을 등에 지고

가물가물 걸어오고 있다

 

 

 

 

# 오두섭 시인은 경북 선산 출생으로 1979년 매일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소낙비 테러리스트>, <내 머릿속에서 추출한 사소한 목록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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