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허공에 우울증이 매달려 있다 - 심명수

마루안 2021. 4. 27. 21:57

 

 

허공에 우울증이 매달려 있다 - 심명수


관념의 다이아몬드 못을 박아 거미가 집을 지었다
먹줄 튕기며, 팽팽한 얼개
때론 탄력 있게 얽어놓고
사람들은 함부로 그 생의 회로도를 빗자루로 쓸어낸다
청소용역인처럼 중요한 증거를 함부로 삭제해 버린다
가끔 누락된 것들 사다리 타고 내려와
쓸려나간 원인을 묻고 가기도 한다

누군가 이 세상으로부터 영원히 누락되었다
맑은 허공에 파문이 인다
파문은 거미집처럼 의혹을 남기고 허공을 아파한다
허공이 우울증을 앓고 있다
아침, 저녁으로 고질병 같은 안개 밀려왔다 밀려간다
말랑말랑한 잠을 흔들어 깨워놓고 천연덕스럽게 웃는 얼굴
핼쑥한 그림자도 끌고 와 발밑에 함부로 버린
나의 원고들과 생의 질긴 목을 조인다

누가 방아쇠를 당겼을까
반짝이는 물결, 깨진 거울이 생각을 어지럽힌다
나는 조각난 거울 표면의 모서리에서
이지러진 달을 보듯 본다
적중이다
물컹한 생의 속살 속에서 피가 짓물러 터지고
너는 그렇게 과녁 속으로 떨어졌다
허공은 다시 우울증을 매달고
베레타 M9 실탄이 다시 나를 향해 날아온다


*시집/ 쇠유리새 구름을 요리하다/ 상상인

 

 

 

 

 


온전한 비대칭 - 심명수


뿌리째 뽑힌 새가 죽을 리 없겠지만 정말 죽어버렸다면
그건 새가 갈아 끼운 부리가 없기 때문만은 아닐 거야

오른쪽 나무가 왼쪽으로 세간을 옮겨간 이유는
그건 오른쪽으로 숨통이 트였다는 것이고
내일이면 나뭇가지가 늘어지고 다음 주중 그늘을 걷어갔기 때문이야
가령 나무가 긍정의 고갯짓을 젖는다는 것은 모든 나무가
숨통을 갖고 있지 않을 거라는 착각 때문만은 아니야

그러니까 시끌시끌하던 꽃잎마저 한바탕 떠들지 못하는 거야
최대한 팔을 뻗고 혀를 말았다 풀어놔봐
왼쪽 나무가 왼쪽으로 더 목이 마르다는 걸 알 수 있겠지

온전한 시간은 웜홀의 터널을 빠져나와야만 알 수 있어
언젠가는 돌아올 거라는 것은 꼭 믿지는 마
밑둥치 아래 볼록한 어둠의 나날, 어둠의 사이를 좀 긁어주겠어?

누군가 목덜미를 잡고 뿌리째 뽑아버릴 것만 같은 이 불길함
영원할 것만 같던 이 순간은,
온전한 비대칭의 간극에서 벗어나면
비로소 숨통이 트일 거니?
뿌리째 뽑힌 새는 날아가고 그렇게 새는 꽃 피울 거니?

어떤 오른쪽이 왼쪽으로 세간을 옮겨갈 때

 

 

'한줄 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불편한 잠 - 송문희  (0) 2021.04.28
몰꼬을 트다 - 강영환  (0) 2021.04.27
벽 장미 - 김선향  (0) 2021.04.27
밤의 대릉원 - 이운진  (0) 2021.04.26
기억에는 라일락이 핀다 - 정선희  (0) 2021.04.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