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의 대릉원 - 이운진
이 밤
누가 나를 돌려세워
미혹(迷惑)을 고백하게 하나
나는 지친 걸음으로, 그보다 더 지친 영혼으로
어둠 속을 들여다본다
둥근 달빛
둥근 무덤 사이
지금으로부터 아주 먼 삶에서 건너오는 듯
수 세기의 바람이 지나가는데
짧은 생애 동안 나는 얼마나 많은 나였던가
아무도 기억 못 할 글을 쓰는 수인(囚人)이었고
사랑이 던져버린 돌멩이였으며
슬픔의 징후였으니
이곳에서 나는 얼마나 많은 추방자였던가
이제 젊음도 없이 젊은 나를 데리고
나 자신의 허구로 사는 날
얼마나 남았을까 생각한다
빠져나갈 수 없는 아프고 허망한 이 삶도
선물이라는 말로 불러도 되는 건지
어딘가 있을지도 모르는 신을 향해
대답 없는 질문을 하며
둥근 달빛 속
둥근 무덤에
가만히 누워본다
한때 눈물이었고
영광이었던 모든 것이 사라진 자리에
잔잔한 풀꽃들 피어 흔들리고 있다
*시집/ 톨스토이역에 내리는 단 한 사람이 되어/ 천년의시작
헌책방에서 - 이운진
볕이 좋은 날
빈 가방을 들고 헌책방에 간다
한때는
누군가를 오싹하게 하거나
누군가의 가슴을 따뜻하게 덥혀주었던 책들을
허락된 목격자처럼 살펴보다가
그가 다가온다.....
2003. 사강 새롭게 느낀다
네가 선물한 책을 혼자 읽었다. 원
이 짧은 문장을 책 속에 남기고 떠나보낸 이들은 누구일까
궁금해진다
분명 등을 돌려야 할 이유가 있었을 거라고
낡은 책 속에서
흰빛을 잃도록 잠든 꽃잎
납작하게 눌린 파리를 보는 것보다
더 놀란 마음을 가만히 쓸어내린다
큰비 뒤에 읽을 인생과
자오선 아래 까만 밤을 지켜줄 그림들
너무 세게 껴안으면 안 되는 새끼 고양이를 안듯
새로 산 헌책을 안고
가방 속 책들의 무게만큼
낙관주의자가 되어보기로
아직은 사람을 사랑해 보기로
햇볕 속에서 혼자 곰곰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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