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감자꽃 필 무렵 - 허림

마루안 2021. 4. 23. 22:03

 

 

감자꽃 필 무렵 - 허림


언제든 떠날 애인이었다
집은 자주 비었고
방에선 오래된 냄새가 났다
개들이 짖는 게 낯설지 않았고
괭이들이 뒤돌아보며
뒤란에 몸을 숨겼다
내 모르는 소문이 떠돌았다
누군가 나를 보고 있다
감자꽃이 피고
그믐밤도 길은 환했다
애인이 떠난 저녁이었다


*시집/ 누구도 모르는 저쪽/ 달아실출판사

 

 

 



삭망 - 허림


갈 길이 쇠털같이 많다고 했지만 꽃들은 지금 한창

장터에서 만난 몇몇은 다음에 밥이나 먹자고 했지만 그는 내 손을 잡아끌고 아리랑순댓국집으로 들어갔다 순대에 딸려 나온 허파와 혓바닥 염통 오소리감투

오늘이 지나간 날들이 달력에서 희미해지고
오는 금요일이 며칠이니 무슨 요일이니 물었을 뿐 아무도 지나간 시간이 언제 오냐고 묻지 않았다

설사 꿈이 찾아왔어도 '참 시안타 무슨 일이지'

지나간 일들이 지나가듯 지나간 건 금세 잊어버리고
다시 기억해야 할 일을 기억하지 못하듯 별 일 없었다
생각해보겠다는 말을 달은 기억하지 않는다

그러고 보니 지나온 길들이 다 환하다

 

 



# 허림 시인은 1960년 강원도 홍천 출생으로 강릉대 영문과를 졸업했다. 1988년 강원일보 신춘문예, 1992년 <심상> 신인상 당선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신갈나무 푸른 그림자가 지나간다>, <노을강에서 재즈를 듣다>, <울퉁불퉁한 말>, <이끼, 푸른 문장을 읽다>, <말 주머니>, <거기, 내면>, <엄마 냄새>, <누구도 모르는 저쪽>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