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수면유도제 - 전영관

마루안 2021. 4. 22. 21:53

 

 

수면유도제 - 전영관


신의 안검이 덮이듯 밤이 오면
신문 부고란에 투고하고 싶어진다

한파를 건너오느라 발 시린
슬픔만 과장된 바람에게 신을 신겨주고 싶다
폐지 할머니의 리어카를
보험이 필요 없는 나라로 밀어주고 싶다
등 돌리는 길고양이에게
사람을 버리듯 내게서 떠나는 몸짓이냐고
묻고 싶다

자동문보다 눈치 빠르게
벽만큼 신중하게 고민한 후에

애인보다 가까운데 실속 없는 편의점에서
부모처럼 수고롭고 멀지만 다 갖춘 마트로
개종하고 싶다

책마다 그득한 밑줄들을 낙서라고 지워버렸다
이전의 호감들은 오해였다고 끄덕였다
내 문장은 비문이라 낙담하면서
절창의 제국에 난민 신청 하고 싶다

연명치료를 거부하는 초월을 터득하고 싶다
건강할 때는 사소하다 흘려버렸던
사소한 것들의 목록을 되찾고 싶다
내 앞에서 먼저 죽는 참혹이 싫어서
나보다 오래 사는 사람과 살고 싶다

천국신문 부고란에는
입국하고도 이승의 얼굴을 잊지 못하는
바보들 이름이 등재된다


*시집/ 슬픔도 태도가 된다/ 문학동네


 

 

 

 

본색 - 전영관


물그릇을 기울이면 넘쳐흐르듯
꽃 보느라 몸 숙이다가
봄을 엎지르는 것이다

칼바람이 바닥나더니 초록도 반갑고
낮은 것들이 더 높아져서
씀바귀와 냉이가 보인다

겨울을 횡단한 자의 지혜를 흉내낸다
희망은 유지하기 힘겹고 쉽게 상해서
꽃보다 안전하고 가까운 풋것들에게 마음 기운다

귀인을 영접하듯 무릎 구부리고 바람꽃 보느라
오후가 서쪽으로 흘러가는 것도 몰랐다

피는 순서는 자식 입학일처럼 손꼽으면서
질 때는 다음 꽃을 기다리느라 수다스럽다
소화제처럼 흔한 서정이 싫증난다
단지 갔을 뿐이니 다시 내다보지 말아야지*

서로들 흩어지고 행방이 묘연해지면
힘만 센 근육질 초록들이 왕왕거리겠지
봄을 알아버린 소녀에서
여인으로 몸을 바꾼 목련이 목련 아닌 듯 서 있다
곧 번성할 꽃그늘의 깊이를 알려면
저 음전한 복화술사의 비법을 알아내야 할 것 같다

꽃이 가고 그늘이 오듯
사람이 지면 수심(愁心)만 진해진다


*왕유(王維), 산중송별(山中送別)의 "단거막부간(但去莫復間)"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