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이를테면, 나는 돈오돈수(頓悟頓修)로 늙는다 - 전인식

마루안 2021. 4. 22. 22:02

 

 

이를테면, 나는 돈오돈수(頓悟頓修)로 늙는다 - 전인식


이를테면, 나는 돈오돈수로 늙는다

불어오는 바람에 천천히 늙어가는 것이 아니라
일 년에 한두 번, 그것도
꽃이 필 때와 질 때 불과 며칠 사이
나는 일 년 치를 한꺼번에 늙는다

피와 살이 강물처럼 빠져나가고
어디론가 뒤따라간 마음 또한 돌아오지 않는
들불이 지나간 듯 허허로운 가슴 기슭에
바람이 불고 비가 오고 눈발이 날리며
한순간 사계절이 일순할 때
누군가를 그리워하고 미워하는 일도
하늘 날아오를 듯 날개짓하는 열망과
물속으로 가라앉는 돌 같은 체념도
다 이맘때 일어나는 일

뜨겁게 살아있음을 확인하는
불과 며칠 사이 나는 늙는다
선명한 나이테 무늬를 그리며
단박에 늙는다

이를테면, 나는 돈오돈수로 늙는다

 

 

*시집/ 검은 해를 보았네/ 불교문예

 

 

 

 

 

 

뱀, 나의 윤회 - 전인식
-서시序詩


지금 내가
눈 뜨고 감아도 보이지 않는 그대
언젠가는 다시 만날 수 있으리라

짧게 인간으로 살았던 오만했던 나날로 하여
가시덤불 한 마리 뱀으로 기어 다니는
그때, 똑똑히 그대 볼 수 있으리라

눈물 마르지 않는 차가운 몸뚱아리 질질 끌며
인간의 마을 배회하고 있을 때
어린 날 던져대던 돌멩이와 몽둥이질
피 흘리고 뼈 부러지는 아픔으로 되돌려 받으며

잘났던 인간으로 누렸던 기쁨보다
더한 오랜 슬픔과 고통으로
참회의 세월을 견딘 한참 뒤에서야
내가 인간이었던 날에 보지 못한 그대
두 눈 똑똑히 볼 수 있으리라

 

 

 

 

# 전인식 시인은 경북 경주 출생으로 동국대 경영대학원 석사과정을 졸업했다. 1997년 대구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및 1998년 <불교문예> 신인문학상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는 <검은 해를 보았네>, <모란꽃 무늬 이불 속>이 있다. 선사문학상, 통일문학상 등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