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찢어진 고무신 - 이산하

마루안 2021. 4. 21. 21:46

 

 

찢어진 고무신 - 이산하
 

감옥의 독방에 살 때 내 옆방에 젊은 사형수가 들어왔다.
세상을 충격과 공포 속으로 몰아넣은 연쇄살인범이었다.
그는 한겨울에도 사각팬티만 입고 운동장을 뛰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매일 혼자 운동장을 달렸다.
우리는 서로 얼굴은 보지 못하지만 가끔 통방을 했다.
"오늘은 몇 바퀴 뛰었어요?"
"어제보다 한 바퀴 덜 뛰었어요."
대답은 늘 똑같았다.
그게 몇 바퀴인지 나는 한 번도 묻지 않았다.
아마도 '덜 뛰는' 날이 없을 때가
마지막 날일지도 모른다고 막연히 짐작만 했다.

멀리 구치소 담장 위로 낙엽이 직각으로 떨어지는
어느날 아침이었다.
평소 수런거리던 복도가 쥐 죽은 듯 조용했다.
유난히 큰 교도관의 발자국 소리가 옆방에 멈췄다.
"수번 5046번 접견!"
"오늘 면회 올 사람 없는데요?"
"....."

갑자기 내 온몸에 전율이 일어났다.
옆방의 철문을 따는 둔탁한 소리가 들렸다.
난 얼른 내 하얀 고무신의 뒤축을 이빨로 물어뜯어
벽 밑에 뚫린 작은 식구통으로 내밀며 말했다.
"그 신발 내 주고 이거 신고 가요."
긴 복도로 걸어가는 그의 넓은 등을 끝까지 보았다.
그는 걷다가 자꾸 신발이 벗겨져 멈추곤 했다.
필시 먼 길 떠나는 줄도 모를 그가
조금만이라도 햇볕을 더 쬐고 가라고
난 일부러 신발이 헐렁하도록 찢어놓았다.
옆방에 새로운 사형수가 들어왔다.


*시집/ 악의 평범성/ 창비

 

 

 



노란 넥타이 - 이산하


넥타이공장 안은 크레졸 소독약 냄새가 진동했다.
젊은 사형수의 유언이 끝나고 목에 넥타이가 걸렸다.
얼굴에 흰 천이 덮이자 죄수의 숨소리가 거칠어지면서
코와 입에 닿은 부분이 풍선처럼 부풀어 오르내렸다.
낡은 넥타이는 목기름에 졸아서 노란색으로 변했다.
무표정한 교도소장이 손가락 하나를 까딱하자
5명의 교도관들이 동시에 집행 버튼을 눌렀다.
정상작동 버튼은 5개 중 1개이다.
'쿵'하는 소리와 함께 죄수의 발밑이 푹 꺼졌다.
의자가 떨어지면서 넥타이가 끊어질 듯 팽팽해졌다.
얼마 전에는 줄이 끊어져 죄수가 추락하는 바람에
부러진 발목을 응급처치해 다시 매달아 집행하기도 했다.
신부의 기도소리가 뚝 멈췄고 성경책은
죽음을 먹고 자란 듯 지난해보다 더 두꺼웠다.

죄수는 자신이 살아온 삶의 무게만큼 목이 조여졌다.
넥타이가 잠시 낚싯줄처럼 부르르 떨다가 잦아졌다.
이번엔 목이 부러져 즉사하는 대신 질식사했다.
질식사는 완전한 사망까지 10분쯤 걸렸다.
커튼 너머 집행교도관들의 소곤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갔어?"
"아직...."
실내에 한동안 건조한 침묵이 흐르다 다시 들렸다.
"아직도?"
"이번엔 좀 오래 걸리네."
살아온 시간이 짧아 가는 시간만이라도 연장하는 듯했다.
한 생이 지는 시간은 불과 30분도 걸리지 않았다.
사형집행 후 아침마다 넥타이를 골라 목을 매는 참관인들이
모두 퇴실하는데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다음부터는 새 넥타이로 바꿔야 될 것 같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