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그녀가 두고 간 쪽지 - 김보일

마루안 2021. 4. 15. 21:59

 

 

그녀가 두고 간 쪽지 - 김보일

 

 

잠든 남자의 머리맡에 새 신 하나를 놓아 주고

여자는 일력의 뒷면에 쪽지를 쓴다

 

참개구리가 울고 살구꽃이 피고

물양귀비의 가랑이 사이로 물고기들이 숨고

아픈 나무의 발목에도 새들이 지저귈 거에요

바람이 울고 간 자리마다 못 보던 풀들이 돋아나면

당신은 이마 위에 얹힌 물수건을 걷고

어느 낯선 동리의 나무 아래를 지나가며

모르는 사람의 이름을 구름에 적어 보내실 테죠

 

햇살이 아침의 눈꺼풀을 들어올리는 시간

목련나무 아래 그녀가 써 놓고 간 문장이 가득하다

 

 

*시집/ 살구나무 빵집/ 문학과행동

 

 

 

 

 

 

보길도의 밤 - 김보일

 

 

달빛이 붉은가시나무와 쥐똥나무의 목덜미를 쓰다듬는 밤, 여인숙 이부자리에서 길 잃은 터럭 하나를 주웠다 노련한 사냥꾼은 잠자리만 보아도 어떤 동물이 묵고 갔는지, 어떤 짐승들이 울다 갔는지를 안다 했지만 나는 서툰 길의 사냥꾼, 터럭의 주인공을 도무지 알 수가 없다 다만 고슬고슬한 터럭의 모양새로 보아, 밤꽃 향기가 허옇게 끈적거리는 등불을 켜는 깊고 어두운 동네의 입구에서 피었다 스러지는 불꽃의 이부자리를 삐쳐 나와 터벅터벅 달빛의 길을 걷던 터럭이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터럭 하나의 길을 떠올리며 낡고 추레한 방에서 나눴을지도 모를 가난한 연인, 라면으로 허기를 때웠을지도 모를 그들의 허술한 만찬과 사랑을 생각해 본다 가난은 때로 얼마나 으늑하고 깊은 포옹인가 가난할수록 더운 호흡 하나가 덜컹거리는 장지문 사이로 빠져나오면 자갈돌들은 억년의 외로움으로 자갈자갈거렸을 것이고 파도는 괜찮다, 괜찮다 하며 천지 여인숙에 깃든 객실의 손님들, 자갈돌들의 이마를 쓰다듬었을 것이다 한 사내의 폐부를 빠져나왔을 깊은 숨소리가 담뱃진에 얼룩져 있는 여인숙의 바람벽, 말이 없는 달빛의 위로로 깊어지는 보길도의 밤

 

 

 

 

*서시

황혼 속 황소 돌아온다

 

후릿고삐에

갈라진 가슴

쩔렁거리며

온다

돌아와 누워

산이 되는

침묵을 몰고

온다

팔만 사천 길

제 속의 내장을

쏘아보던

눈망울 달고

온다

발자국에 꽁꽁

채찍을 묻고

핏빛 노을 치받는

뿔 하나로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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