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전화번호를 지우다가 - 박윤우

마루안 2021. 4. 15. 22:15

 

 

전화번호를 지우다가 - 박윤우


우리 집에는 고양이 한 마리와 묵은 이명씨(耳鳴氏)가 산다
오늘따라 내가 흔하다
나는 계단참이고 우산이고 한 번도 가보지 못한 풍경이다 우스운 일에만 웃는다

인적 드문 내소삿길, 인중 긴 꽃을 내려다보며 눈으로 만졌다
무슨 계획 같은 게 있을 리 없는 꽃
풀 먹인 모시적삼 깃동 같은 녀석에게 안녕하세요? 정중하게 인사를 건넨다

거기, 매발톱
꽃은 폭발이 아니라 함몰이다

사월의 허리를 부축하는 미나리아재빗과 누두채(漏斗菜)
대궁 위의 푸른 뿔, 안으로 안으로 구부리는
푸른 화판
끼리끼리 붐비며 함몰 중이다

잎도 안 난 노루귀가 매발톱 따라 고개를 꺾는, 매발톱과 노루귀 사이 너를 묻으며 비를 맞았다

돌아와, 식은 밥에 물 말아먹고 수첩을 꺼내 전화번호를 지우는데, 이명씨(耳鳴氏)가 어딜 그렇게 쏘다니느냐며 속삭인다


*시집/ 저 달, 발꿈치가 없다/ 시와반시

 

 

 

 

 

 

동고비 - 박윤우


동고비 부리가 낱장으로 쪼아 넘기는
살구나무 달력

누가 백주대낮에 엉덩이를 까고 종주먹을 들이대나, 기립박수를 치나, 하늘 귀에 분홍 구멍이 낭자하다

살구꽃 그늘에서 살구술을 마시다 잠이 들면 살구꽃이 져야만 술이 깨겠다

누군가의 질문과도 같고 또 누군가의 육필 자백과도 같은
늙은 살구나무가 숨가쁘게 밀어내는 분홍, 분홍을 부려놓은 바람이 가던 길을 마저 간다

저 꽃이 지고나면 꽃 진 자리 시 한 줄 여물겠지
대낮이 대낮의 속도로 이우는 사월을 늙은 시인이 분홍에 타서 기울이고 있다

하늘색 동고비와 동고비색 하늘이 살구나무 가지 사이로 주기(酒氣)를 염탐하는
시나브로 분홍, 차마 분홍

그러니까, 간지럽다는 데가 사월의 뒷덜미인가, 발바닥인가?

살구꽃이 묻어나는 기침을 꽃그늘에 내다버리다가
동고비의 안부를 귓바퀴로 여미다가

 

 

 

# 박윤우 시인은 경북 문경 출생으로 대구교육대학을 졸업했다. 초등교사 2년, 검정고시를 거쳐 중등 미술교사 10년, 대구 제3미술학원을 운영하며 미술학도들의 창의성을 20년간 망가뜨렸다. 그 죄로 7년 째 시를 쓰고 있다. 2018년 <시와반시>로 등단했다. 첫 시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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