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연분홍 유언이 있었다 - 천수호

마루안 2021. 4. 12. 19:26

 

 

연분홍 유언이 있었다 - 천수호


노래만 남기고 꽃잎은 가져간 사람이 있다

투병은 길었다

만개하기 전에 꽃잎이 먼저 부스러져서
그는 잘 보지 않는 책갈피를 열고 들어가겠다고 했다

핏기도 핏물도 없는 페이지에 잘 찍은 발자국처럼
꽃잎 가랑이를 찢어도 보았구나

그래, 당신이었어!
언젠가 그를 그렇게 열어볼 날이 있을지도 모르지

꿈인지 생시인지도 모르게
그는 더 먼 곳에 있겠다고 했으니

꽃잎은 병색도 모르고 그를 따라갔고
물기가 빠져나간 페이지에
이야기들만 남아 개미처럼 기어다니겠지

한 페이지 넘기고 듣고
한 페이지 넘기며 따라 부르고
그런 사랑이 있었는지도 모르게 납작해진
꽃잎을 간혹 건드려 깨워야지

딱풀처럼 잘 붙은 사랑 얘기는 다시 열지 말까?

오래 덮어둔 책이 있는지도 모르는 날이 올 테니까
꽃잎만 남기고 노래를 가져간 사람이 있다고
가물거리며 말할지도 몰라

그런데 참 이상하지?
노래와 꽃잎 이야기가 서로 나뉠 수 있다는 것
개미처럼 꼬물거리는 글자들을 암호 삼아
남이 읽지도 듣지도 못하게 밀봉해둔 유언이 있다는 것


*시집/ 수건은 젖고 댄서는 마른다/ 문학동네

 

 




물집 - 천수호


비명이었다 절벽을 흐르는 분홍 꽃
그는 귀머거리처럼 절벽을 모른다

아찔한 것은 언제나 나였다

신음이었다 바위 사이를 벌리는 초록 잎
그는 원시안처럼 틈을 모른다

아득한 곳을 바라보는 것이 그의 습관이었다

마른가지 끝에 꽃 대신 눈을 찔러 걸어놓고 간 날들
꽃 핀 흔적들은 다시 꽃눈이 되었다
사월은 다 피어나고
나만 흔적이다

아물 듯 터질 듯 대기는 다시 더듬는다

이쯤이었으리라 그가 멈춰선 봄

 

 

 

 

# 좋다. 이런 시를 한 번만 읽고 말기에는 여운이 너무 길어 여러 번 읽으니 더 좋다. 코로나 정국에도 봄이 왔다. 움츠린 사람을 위로하고 싶었을까. 너무 일찍 핀 꽃, 코로나가 꽃구경마저 빼앗아갔다. 유언처럼 꽃이 지고 봄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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