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층권의 황혼 - 허진석
인천에서 이륙해서 석양을 맞으면
태양계의 행성들이 반대편 창에 줄을 선다.
한 겁에 딱 한 번 일렬로 서서
모세의 바닷길처럼 바짝 마른 길을 낸다.
명왕성까지 간다.
오후 일곱 시 발 에어버스,
흑인 승무원이 적포도주를 따라주는 복도 끝
캄캄한 저곳에서 선명한 그림자 속에서
내려갈 수 없다, 돌아갈 수 없다고 누군가 고함을 친다.
아버지다, 어머니다,
명왕성이다.
가장 먼 그곳에 가 보지는 못했어도
본 사람은 있다.
새벽별 눈에 담은 싯다르타나
저 아래 중앙아시아의 산맥 위를 나는 독수리
얼음과 붉은 대지와 콸콸 흐르는 강산强酸의 하천을 노래한다.
아버지가 어머니가 그곳에 살아
나 모르게 죄를 지었다면 인연의 새 사슬을 끌며
아들과 딸과 미처 보지 못한 기억마저 기다리리라.
젊은 부모, 거듭 신혼이 되어
다시 나를 낳을 것이다.
"이봐요, 거긴 사람이 살지 못해."
바보.
석양 반대편에서 바라보면 저 시퍼런 지구도
숨 붙일 곳
사람이 살 별이 아닌 걸.
죄다 죽어 나가잖아!
*시집/ 아픈 곳이 모두 기억난다/ 파란출판
중년 1 - 허진석
동안(童顔)이란 말을 자주 들을수록
고개를 넘어가는 나의 생애는
1978년 9월 1일
청량리 맘모스백화점 앞에 불던 바람이며
그 앞에 내가 입고 선 교복이고
1987년 4월 3일 황학동 골목
골동품 가게에 둘러싸인 헌책방이고
2004년 4월 3일 홍제동 고가 차도이다.
무엇보다 조심해야 할 한마디 말
짙푸른 연기이다.
# 허진석 시인은 서울에서 태어나 동국대 국문과를 졸업했다. 1985년 <현대시학>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타이프라이터의 죽음으로부터 불법적인 섹스까지>, <X-레이 필름 속의 어둠>, <아픈 곳이 모두 기억난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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