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우는 냉장고 - 윤석정

마루안 2021. 4. 10. 21:55

 

 

우는 냉장고 - 윤석정


비 그치고 안개가 이불처럼 펼쳐진 새벽
젖은 나무들이 게워낸 꽃봉오리는
이역만리에서 달려온 저번 생들의 발바닥
이번 생을 살고자 저번 생이 딱 한 번
꽃신 신고 북쪽으로 행군할 채비를 했고
때마침 비는 나무의 발바닥으로 스며들었다
나는 겨우 목숨만 챙겨 왔다
내 마음에서 사는 것들은 안개보다 더 희뿌옇고
죽음에 얼룩진 발바닥을 가졌다
발바닥을 디뎌야 일어날 수 있듯
나는 죽어야 살아나는 것들을 생각했다
무덤 안으로 들어갓던 개구리들이
개울가로 기어 나와 알을 낳고 밤낮으로 울었다
우는 소리를 엿듣다가 방문을 닫으면
냉장고가 방구석에 웅크린 채 쉴 새 없이 울었다
마음을 열어젖히고 다 내어 준 서러운 목숨들
나는 내 마음에서 죽은 것들을 생각했다

 

 

*시집/ 누가 우리의 안부를 묻지 않아도/ 걷는사람

 

 

 

 

 

 

말 못할 말 - 윤석정
-백수광부(白手鑛夫)


절박한 말들이 절망할 테니 쉽게 말 못 할 말이거든 말을 말자

그는 탄가루와 땀내가 뒤섞인 작업복을 입었다가 벗는다고
문장의 모서리를 몇 번 접어 주머니에 넣고는
비탈진 언덕을 다급히 기어오르는 눈발을 보았다고
문장의 끝을 만지면 이루지 못한 사랑처럼 아팠다고
밤새 마음에 불 지피려 했던 그는 어리석었다고
눈 그치자 이력서를 들이밀듯 뜨는 별들을 보았다고
밤하늘에 구멍을 뚫고 나온 막장의 말이었다고
그때는 난로 옆에서 코 벌렁거리는 연탄을 보면서
그도 발화를 기다리는 중이었다고
이른 아침 버스는 고래 등허리 같은 산(山)을 지났고
그의 주머니에서는 쉽게 쓰지 못한 문장들이 오물거렸다고
난로 옆에 앉은 그는 어쩔 수 없이 미혼이었다고
떠난 사랑이 남긴 잿더미를 쇠수레에 담다가
오래 퇴적해 응어리진 행간을 파헤치고 파냈다고
읍내 장터를 떠돌던 눈발처럼 그는 낮아졌다고
인력 사무실 갈탄난로에 불을 댕겨도 쉽게 불이 붙지 않았다고
행간이 깊어진 절박한 말들을 구겨 난로 안에 던지려 했다고

나는 십여 년 만에 그의 문장들이 매장된 휴지통을 비웠다

 

 

 


# 윤석정 시인은 1977년 전북 장수 출생으로 원광대 국문과, 중앙대 대학원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2005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당선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오페라 미용실>, <누가 우리의 안부를 묻지 않아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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