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종점 - 김유석

마루안 2021. 4. 8. 22:22

 

 

종점 - 김유석


오래된 벽화처럼, 담벼락에 두 사람의 노인네가 몸을 말고 붙어 있다.

서캐 같은 춘삼월 볕에 그림자가 이따금 꿈틀, 무릎에 묻힌 몸이 풀무치 잔해 같다.

같은 시각 같은 곳을 도는 읍내버스

내리고 타는 이 없어도 슬며시 문을 한 번 여닫고 돌아나갈 때

담장에 나란히 기대어 놓은 지팡이 하나가 스르르 눕는다.

살구꽃이파리 으슬으슬 가지를 털고

들고양이 울음이 소름을 한차례 돋쳤을 뿐,

떠난 몸에 묻어 있는 볕뉘 긁어모아 남은 이의 적막을 염하는 석양이

힐끗, 다음 배차 시간표를 들여다본다.


*시집/ 붉음이 제 몸을 휜다/ 도서출판 상상인

 

 

 

 

 

처서 - 김유석


혼자 살다 가는 이의 유품 같은 날이었다.

지난다는 말, 물러간다는 기별 다시 오지 못한다는 뜻으로
울음보다 긴 적요를 끌고 다음 생을 건너는 늦 매미.

한 철 오독하던 느릅나무 무거운 그늘을 벗는 하오.

속곳처럼 편안해진 외로움을 오수 속에 널어놓고
끝물의 고추 솎으러 가는 홀어미 선 꿈자리 맡.

메밀잠자리 날면 오이를 걷고 메밀을 놓을 때

쓰다만 유서처럼, 박박 기던 길 넝쿨째 끌려와
몇 날을 밭귀처럼 식는 오이 몸통에 누런 젖꼭지가 두엇.

한 번뿐인 생이 여러 번 다녀가듯 혼곤한 날이었다.

 

 

 


# 김유석 시인은 1989년 전북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1990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 2013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동시 당선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상처에 대하여>, <놀이의 방식>, <붉음이 제 몸을 휜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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